Reference = 프랑스의 커피 도입, 커피나무의 역사
Germain-Étienne Coubard d'Aulnay (1832) 著, 『Monographie du café, ou Manuel de l'amateur de café : ouvrage contenant la description et la culture du cafier, l'histoire du café, ses caractères commerciaux, sa préparation et ses propriétés』
커피가 프랑스에서 자리잡기 시작한 것은 커피가 채택된 지 불과 10년 만이었다. Leonard Rauwolf가 1583년에 처음으로 Cafier를 언급했기 때문에 이전에 그곳이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파도바 출신의 유명한 의사이자 위대한 식물학자인 프로스페르 알핀(Prosper Alpin)은 1591년 베니스에서 자신이 이집트에서 본 나무에 대해 설명하고 Bon, Ban 또는 Boun이라는 이름을 붙인 작품을 출판했다. 이 작품은 또 다른 유명한 이탈리아 의사인 베슬링키우스(Veslingius)가 이 논문에 대해 작성한 관찰 및 메모와 함께 1640년 파도바(Padoue)에서 재인쇄되었다. 1624년 베룰람의 베이컨 (Bacon de Verulam)은 그의 저서 Sylva sylvarum에서 커피를 동양에서 널리 사용되는 음료라고 말했고, 마이스너(Meisner)는 1621년에 이 귀중한 콩에 관한 논문을 썼다. 이탈리아에서는 사람들이 1645년경에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으며, 프랑스는 1644년에 피에트로 델라 발레(Pietro della Valle)라는 베네치아 사람이 커피를 마르세유(Marseille)에 가져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프랑스에 커피를 처음으로 소개한 사람이 테브노(Thévenot)였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첫 번째 여행에서 돌아온 것은 1657년이 되어서야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우리가 말한 베네치아 사람이 커피를 터키에서 마르세유로 가져온 직후, 또 다른 여행자가 커피 뿐만 아니라 그 목적에 사용되는 모든 작은 가구 조각과 금, 은, 비단으로 수놓은 작은 모슬린 냅킨도 그곳으로 가져왔다. 하지만 그 당시 카페는 여전히 호기심의 대상에 불과했다. 그러나 1660년 레반트 지역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며 그곳에서 커피 습관을 키워온 마르세유의 몇몇 상인들이 이집트에서 몇 가마니를 가져왔다. 마르세유에서 커피 사용이 리옹, 프로방스 및 인근 지방에 소개되었다. 1671년 마르세유에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커피를 판매하는 가게가 롯지 주변에 문을 열었다. 그러므로 마르세유에서는 커피가 우리 기후의 주민들에게 적합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의사들의 단언에도 불구하고 커피의 사용이 일반화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파리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우리는 루이 13세 시대에 커피 달인이 Petit Châtelet, 즉 Cahové 또는 Cahovel이라는 이름으로 판매되었다는 것만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음료가 프랑스에서 호감을 얻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1662년 파리에는 아직 공공 카페가 없었다. 일반적으로 커피는 18세기 중반쯤 유럽에서 어느 정도 보편화되기 시작했다.
1669년 루이 14세의 포르테 (Porte = 1918년까지 오스만 제국 정부) 대사였던 술리만 아야(Soliman Aga)는 파리에 최초로 커피를 소개한 사람이다. 그는 여러 사람에게 그것을 맛보게 했고, 그들은 떠난 후에도 계속 마셨다. 처음에 커피는 파리에서 파운드당 최대 40크라운에 팔렸다. 하지만 이 엄청난 가격은 유지되지 않았다.
몇 년 후(1672년) 아르메니아인 파스칼(Pascal)은 생제르맹 (Saint-Germain) 박람회에 카페를 열었다. 박람회 기간이 끝나자 그는 자신의 사업장을 Pont-Neuf 맞은편 Quai de l'Ecole로 옮겼다. 하지만 아직은 외국인들과 Malthe의 기사(몰타 기사들) 몇 명이 모여 있는 방일 뿐이었다. 그의 카페는 별로 붐비지 않았기 때문에 파스칼은 런던으로 떠났다.
프로코피우스(Procopius)라는 시칠리아인이 카페를 부활시켰다. 그는 파스칼의 선례를 따라 생제르맹 박람회에 자리를 잡았고, 커피의 좋은 품질로 최고의 회사를 유치했다. 박람회를 마치고 1689년에 그는 카페가 여전히 존재하는 코메디 프랑세즈(la Comédie - Française) 극장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아르메니아인 말리반 (Maliban)은 생제르맹 수도원(Saint-Germain Abbey) 근처 Jeu de Paume (주 드 폼 국립미술관) 근처 뷔시街 (Rue de Bussy)에 새로운 카페를 열었다. 그곳에서 그는 생쉴피스 (Saint-Sulpice) 성당 근처의 rue Férou로 이사했지만 곧 rue de Bussy에 있는 그의 첫 번째 건물로 돌아왔다. 어떤 사업으로 인해 그는 네덜란드로 떠나야 했다.
다른 아르메니아인들과 함께 이스파한(d'Ispahan)에서 온 그곳에서 일하던 페르시아인 그레그와르(Grégoire)에게 카페를 양도했다. (그는 말리반에게서 사들인 가게를 되팔아 코메디 프랑세즈 즉 프랑스 국립극장 맞은 편에 커피 하우스를 열었다. 1689년 코메디 프랑세즈가 포세 생제르맨 거리로 이전하자, 그레고와르는 금세 뒤를 따라갔다). 마침내 알레포 출신의 Étienne이라는 사람이 처음으로 파리에 거울과 대리석 테이블로 장식된 rue Saint-André-des-Arts 방을 생 미셸(Saint-Michel) 다리 맞은편에서 열었을 때 몇 개의 다른 작은 시설이 연속적으로 형성되었다. 이 카페는 오늘날에도 Café Cuisinier라는 이름으로 같은 위치에 존재하며 오랫동안 누려온 좋은 평판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커피숍의 수는 크게 늘어나지 않았고, 이 음료가 언젠가 달성할 성공을 예측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누구나 Madame de Sévigné의 다음 말을 알고 있다. “Racine은 Café처럼 지나갈 것입니다.” 그러나 라신은 낭만주의자들의 선언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 최초의 시인으로 간주되며, 카페는 비방하는 사람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나폴레옹이 그의 전능함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않을 정도로 일반적인 필요가 되었다. 그것을 파괴할 수 있었다.
알레포의 스테판(Stephen of Aleppo)이 제시한 예에 따르면, 당시 작가의 표현에 의하면, 커피가 제공되는 카바레는 대리석 테이블, 거울, 크리스탈 샹들리에로 화려하게 장식된 작은 방이었는데, 이곳에는 정직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도시는 커피를 마시기보다는 그날의 소식을 알기 위해 모였다. 여기서 우리는 관보나 신문의 출판 날짜가 프랑스에 커피가 소개된 때라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최고 수준의 여성들은 종종 가장 유명한 커피숍에 마차를 세웠고, 일부는 문 앞에서 은 접시에 담아 대접받았다.
그 초기에는 Candiot라는 이름의 작은 절뚝발이가 아주 깨끗한 수건을 두르고 한 손에는 특별히 제작한 난로를 들고 있었고 그 위에는 커피 포트가 있었고 다른 한 손에는 물이 가득 찬 일종의 분수대가 놓여 있었다. 카페의 모든 도구가 갖춰진 양철 스탠드가 파리 거리를 달렸고, 카페야, 카페!!라고 외쳤다. 원하는 사람들은 집으로 가져갔고, 그리고 2수 6펜스에 그는 컵 하나를 채우고 설탕을 공급했다. 작은 불구자 Candiot는 이런 종류의 사업에 동료로 레반트 사람인 Joseph을 데리고 있었는데, 그는 커피를 통해 돈을 벌려고 파리에 왔다. 그는 성공했고 노트르담 다리 아래에 카페를 차린 후 큰 부자로 죽었다.
커피를 판매하는 카바레(cabarets)의 주인은 휴대용 카바레에 일부를 도시 전체로 보냈는데, 그 이름은 다리가 없는 작은 테이블이나 쟁반에 커피, 차 및 다른 뜨거운 리큐어, 커피용 컵과 접시가 놓여 있는 쟁반을 의미한다.
새로운 문학 작품을 심사하기 위해 그곳에 갔던 Voltaire, Piron, Fontenelle, Sainte-Foix 등이 카페를 자주 방문했던 Étienne d'Alep과 Procope의 성공은 일부 투기꾼들이 동일한 유형의 여러 시설을 열도록 장려했다. Place du Palais-Royal에 위치한 Café de la Régence는 특히 이곳을 자주 방문하는 체스 선수들 때문에 매우 유명해졌다. Jean-Jacques Rousseau의 플레이를 보기 위해 관중이 너무 많이 유입되었지만 그다지 강하지 않았기 때문에 경찰 중위는 카페 문에 보초를 배치해야 했다. 커피를 제조하는 시설이 점차 늘어났다. 루이 15세 시대에는 600곳이 넘었다. 오늘날 그 수는 3,000곳 이상으로 늘어났다.
커피의 일반적인 맛으로 인해 사람들은 커피를 생산한 나무를 소유하고 싶어하게 되었다.
18세기 초 유럽에서 마시는 커피는 모두 동양에서 들여왔다. 이 귀중한 콩에 대해 아랍인들에게 상당히 높은 경의를 표하는 데 지친 유럽인들은 그것을 생산한 나무를 도용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두 가지 큰 장애물이 그들의 프로젝트 성공을 방해했다. 아랍인들은 커피나무를 가져가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고, 커피콩을 발아시키려는 시도로 인해 아라비아 주민들은 그것을 팔기 전에 끓는 물에 담그거나 오븐에서 말렸다고 추정하게 되었다. 이는 무역의 독점권을 영원히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나무 자체가 바타비아 (Batavia)로 옮겨졌을 때서야 우리는 깨달았다. 우리는 최근에 심지 않으면 씨앗이 싹이 트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했다. 한 프랑스인이 자신의 모국이 아닌 다른 기후에서 카페를 성공시키려고 노력한 최초의 영광을 누렸다. 1670년 디종(Dijon) 근처에 그는 곡물을 심었지만 열매를 맺지 못했다. 암스테르담 출신의 Nicolas Witsen은 1690년에 일부에서는 최근의 열매를, 다른 일부에서는 바로 모카 나무를 바타비아로 운반한 최초의 사람이었다. 이 첫 번째 시도는 가장 행복한 결과를 가져왔다.
같은 해 Batavia 주지사는 암스테르담 온실에 식물 한 그루를 보냈다. 포병대장이자 식물학을 사랑하는 드 레송 (de Ressons)은 네덜란드에서 온 첫 번째 커피 나무를 프랑스로 가져왔고, 1712년 루이 14세에게 선물했고 샤토 마를리(Marly)로 보내졌다. 꽃과 열매를 맺는 모습도 보였지만, 죽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714년 암스테르담 시장 드 브랑카스 (de Brancas)가 루이 14세에게 선물로 또 다른 나무(밑동)(autre pied)을 보냈다. 이 나무는 왕립식물원(Jardin du Roi)에서 돌보게 하였다. 현재 우리 식민지에서 재배되는 모든 커피나무는 이 식물원의 토양에서 자란 이 나무에서 유래되었다.
1716년부터 식물원(Jardin des Plantes)의 씨앗에서 자란 어린 식물은 의사인 Isambert 씨에게 맡겨져 우리 식민지로 운반되었다. 그러나 이 의사는 도착 직후 사망했기 때문에 이 첫 번째 시도는 기대했던 만큼의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1723년에 의사(왕의 주치의) 드 시라크 (de Chirac)는 노르만 신사이자 보병 대장이자 소위인 드 클리외(de Clieux)에게 커피 나무를 마르티니크로 가져가도록 내주었다. 대서양 횡단은 길고 위험했다. 배에는 물이 부족하여 소량 씩만 배급되었다.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이 열매를 전파하는 것의 중요성을 느꼈고 조국을 위해 새로운 부의 원천을 보존하기를 원했던 드 클리외는 자신에게 맡겨진 귀중한 관목에게 물을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마르티니크에 상륙시킬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약하긴 했지만 절박한 상태는 아니었다. 그러자 그의 보살핌은 두 배로 늘어났다. 그는 그것을 자기 정원에서 그것이 자라기에 가장 좋은 곳에 심고 가시 울타리로 둘러싸서 잘 보이도록 두었다. 첫 해에 그는 2파운드의 씨앗을 수확하는 만족감을 느꼈다.
그는 마르티니크 민병대 대령인 드 라 구아리그 쉬르빌리에(Mr. de la Guarigue Survillier)와 그것을 심은 섬의 다양한 주민들에게 일부를 주었다. îles du Vent (벤트섬)의 지방장관인 블론델 주벵크루 (Blondel Jouvencourt)는 1726년 2월 22일자 공식 문서에서 Sainte-Marie 지역에 있는 Survillier 씨의 정원에 여러 개의 커피 나무들이 있었고 기록했다.
M. Tussac은 그의 Flore des Antilles에서 de Clieux에 대해 말하면서 모든 식민지 주민들의 마음 속에 존재해야 한다고 했다.
Esménard는 그의 시 ‘Navigation (항해)’에서 de Clieux의 존경할 만한 헌신을 찬양했다. 그는 말한다:
Sur son léger vaisseau ,
Voyageait de Moka le timide arbrisseau ;
Le flot tombe soudain ; Zéphir n'a plus d'haleines .
Sous les feux du cancer , l'eau pure des fontaines
S'épuise , et du besoin l'inexorable loi
Du peu qui reste encore a mesuré l'emploi.
Chacun craint d'éprouver les tourments de Tantale ;
De Clieux seul les défie , et d'une soif fatale
Étouffant tous les jours la dévorante ardeur ,
Tandis qu'un ciel d'airain s'enflamme de splendeur ,
De l'humide aliment qu'il refuse à sa vie ,
Goutte à goutte il nourrit une plante chérie .
L'aspect de son arbuste adoucit tous ses maux ;
De Clieux rêve déjà l'ombre de ses rameaux ,
Et croit en caressant la tige ranimée ,
Respirer en liqueur sa graine parfumée .
Heureuse Martinique ! ô bords hospitaliers !
Dans un monde nouveau vous avez les premiers
Recueilli , fécondé ce doux fruit de l'Asie
Et dans un sol français mûri son ambroisie .
마르티니크에서 식물은 산토도밍고(Saint-Domingue), 과들루프(Guadeloupe) 및 기타 인접 섬으로 운송되었다. 그러나 일부 저자들은 카페가 이미 1715년에 산토도밍고에 들어왔다고 주장한다. 재배는 과들루프로 빠르게 퍼졌다. 그러나 그것은 몇 년 동안 그곳에서 눈에 띄게 무시되었다. 한때 연간 400만 킬로그램 이상의 커피를 수출했던 과들루프는 현재 200만 킬로그램에서 300만 킬로그램 정도만 수출한다. Boyer-Peyreleau 대령은 이러한 포기를 자부심과 위대한 주민으로 변모하려는 소유자의 헛된 영광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칭호는 식민지에서 설탕 집 소유자에게만 부여된다. 나중에 마르티니크에서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마르티니크에 커피가 소개된 지 몇 년이 지나서야 커피가 카이엔(Cayenne)에 전해졌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1718년부터 네덜란드인들은 수리남에서 성공적으로 재배했다. 무르그 (Mourgues)라는 프랑스 식민지 출신의 도망자는 자신이 가이아나의 네덜란드 기관으로 은퇴하기 위해 떠난 이 나라를 후회하며 그의 동포들에게 돌아오고 싶어했다. 그는 수리남에서 카이엔의 국왕 중위인 드 라모트-에그롱 (Mr. de Lamotte-Aigron)에게 편지를 보내 만약 그가 사면을 약속 받으면 발각될 경우 그를 기다리고 있는 엄격한 처벌에도 불구하고 커피 씨앗을 발아할 수 있는 상태로 가져오겠다고 썼다. 그에게 주어진 말에 그는 1722년에 카이엔에 도착하여 갓 수확한 커피 1파운드를 가지고 해군 위원인 Mr. d'Albon에게 주었고, 그는 그 커피를 심었다. 파종은 완전히 성공적이었고 곧 식민지가 농장으로 덮였다.
1717년 또는 1718년에 파리에 설립된 프랑스 동인도회사는 Dufougeret-Grenier라는 이름의 St. Malo의 선장을 통해 일부 Moka 커피 나무를 부르봉 섬(Ile Bourbon)으로 보냈다. 그들은 왕이 임명한 이 섬의 책임자 중위인 Mr. Desforges-Boucher에게 넘겨졌다. 1720년에는 한 그루만 남았으나 올해는 생산량이 너무 많아 최소 15,000그루의 콩을 심었다. 오늘날 이 섬에서 자라는 모든 커피 나무는 이 나무의 후손이며 무역상에서는 부르봉 커피(Bourbon Coffee)로 알려진 커피를 생산한다.
부르봉이 무역에 커피를 공급하기 시작한 것은 1726년이 되어서였다. 이 나라에는 커피나무의 자생종이나 변종이 있다고 주장된다.
1715년 과학 아카데미 회고록에 따르면 이 섬의 주민들은 Moka에서 돌아오는 프랑스 선박에서 나뭇잎과 과일이 잔뜩 실려 있는 일반 커피나무 가지를 보고 즉시 그들이 산에 있는 나무들과 완전히 비슷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들은 가지를 찾으러 갔는데, 가져온 가지와 비교해 보니 잎사귀와 열매가 모두 정확히 같았다. 그 섬의 커피는 아라비아에서 온 커피나무 보다 더 길고, 더 곱고, 더 푸르다는 것이 발견되었다. 이것이 의심할 여지 없이 일부 자연학자들이 이 커피나무를 아라비아 커피나무와는 다른 특별하고 구별되는 종으로 만들기로 결정한 이유이다.
Knight Nicolas Laws는 1728년 자메이카에서 최초로 커피를 심었다. 하지만 그는 3년 뒤에 세상을 떠났다. 몇몇 식민지 주민들과 상인들은 이 기업을 보호하기 위해 자메이카 커피를 영국으로 수입할 때 부과되는 세금을 줄이는 법령을 의회로부터 얻기 위해 서명했다. 세금이 인하되었다. 소비가 더 많아졌고, 재배자들은 그들에게 새로운 수익원을 제공하는 종자를 증식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했다. 이 과일을 재배하는 데 신대륙의 일부가 사용되었다. 그러나 유럽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커피 나무를 이식한 많은 국가 중 거의 어느 나라도 예멘에서 우리에게 오는 최신 품종보다 품질이 열등하지 않은 커피를 생산하지 못했다. 후자는 맛과 향 측면에서 항상 다른 것보다 훨씬 크다.
16세기 초 포르투갈인이 도착하기 전의 라 레위니옹의 역사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아랍 상인들은 Dina Morgabin, "Western Island" (아랍어 : دنية/دبية مجربي Daniyah/Dībah Maghribīy)라는 이름으로 이 섬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말레이 군도에서 마다가스카르까지 서쪽으로 여행하는 스와힐리 또는 오스트로네시아(고대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 선원들이 이 섬을 방문했을 수도 있다.
유럽인들이 처음으로 이 지역을 발견한 것은 1507년경 포르투갈 탐험가 디오구 페르난데스 페레이라 (Diogo Fernandes Pereira)에 의해 이루어졌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불분명하다. 1512년 포르투갈인 돔 페드로 마스카레나스 (Dom Pedro Mascarenhas)가 이끄는 탐험대가 인도양에서 3개의 섬들을 처음 발견했다. Dom Pedro Mascarenhas는 Mascarenes인 레위니옹 주변의 군도에 자신의 이름을 붙였다 (마스카랭 諸島 Mascarene Islands). 현재의 모리셔스 (Mauritius island), 로드리게스 (Rodrigues island), 레위니옹 (Reunion island)로 이뤄진 해역이다. 레위니옹 섬 자체는 가장 좋아하는 성인의 이름을 따서 산타 아폴로니아(Santa Apolónia)라고 불렀다. 이는 포르투갈인이 발견한 날짜가 그녀의 축일인 2월 9일이었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 1509년에는 Diogo Lopes de Sequeira 가 레위니옹 섬과 로드리게스 섬에 상륙했다고 한다. 그러나 마스카레나스의 나라 포르투갈은 주민을 정착시키거나 지배하지 않았다.
1600년대 초까지 포르투갈의 명목상의 통치로 인해 산타 아폴로니아는 사실상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 후 이 섬은 프랑스에 의해 점령되었으며, 모리셔스의 포트 루이스에서 관리되었다. 최초의 프랑스 주장은 François Cauche와 Salomon Goubert가 1638년 6월에 방문한 1638년부터 시작되었지만, 1642년 3개의 섬 중 가장 서남쪽에 있는 섬 하나는 프랑스 동인도회사가 아프리카 최남단을 돌아 인도로 가는 루트에 기착지로 사용하기 위해 섬에 주민들을 정착시키고 프랑스의 땅으로 만들었다. 프랑스의 Jacques Pronis가 12명의 프랑스 반란군을 포로로 마다가스카르의 섬으로부터 추방하면서 이 섬에 대한 공식 소유권을 주장했다. 그 죄수들은 몇 년 후 프랑스로 송환되었고, 1649년에 이 섬은 프랑스 왕실 부르봉 왕가의 이름을 따서 부르봉 섬으로 명명되었다. 식민지화는 1665년 프랑스 동인도 회사가 최초의 정착민을 파견하면서 시작되었다.
17세기 인도 및 중국과 고도로 발전된 해상 무역에 참여하는 모든 유럽 국가는 남부 아프리카 주변에 정착지를 소유했다. 포르투갈인들은 모잠비크에, 네덜란드인들은 희망봉과 모리셔스 섬에, 영국인들은 세인트헬레나 섬을, 프랑스인들은 부르봉 섬에 정착했다.
이는 해당 기간의 항해 조건으로 인해 필요한 것이었다. 선박은 4~5개월 간의 여행을 거쳐 이 바다로 항해하게 되며, 선원들은 물론 식량을 보충해야 한다. 긴 여행을 하는 사람들이 직면한 가장 큰 위험은 비타민, 특히 비타민 C가 부족하여 발생하는 전염병인 괴혈병의 발병이었다. 당시 알려진 유일한 치료법은 최근에 수확한 비타민이 풍부한 식품을 배포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또한 요리를 위한 나무 뿐만 아니라 물(1인당 하루 5리터)도 새로 공급해야 했다. 때로는 배를 수리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프랑스인들은 17세기부터 여러 차례 이 항로를 항해해 왔으며 종종 필요한 '보급품'을 찾을 수 있는 마다가스카르 해안을 따라 정박하곤 했다. 1642년 리슐리외(Richelieu)는 프랑스와 동아시아 무역에 영구적인 성격을 부여하고자 the Oriental Company를 설립하고 마다가스카르 남동쪽에 포트도팽 (Fort-Dauphin)(젊은 루이 14세의 이름을 따서 명명)을 설립했다. 또한 그는 마스카랭 섬(island of Mascarin)을 소유할 것을 제안했는데, 거버너 플라쿠르(Flacourt)는 "풍부함과 비옥함을 표현할 적절한 이름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부르봉 (Bourbon)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 섬은 해안에 자연적인 형태의 피난처가 없었기 때문에 그때까지 유럽인의 존재가 전혀 없었다.
프랑스 소유 하에 이 섬은 때때로 휴식이 필요한 아픈 선원들과 사회의 다양한 '바람직하지 않은' 구성원, Fort-Dauphin에서 추방된 버림받은 사람들이 방문했다. 1663년 회사의 대주주인 La Meilleraye 원수의 요청에 따라, 이사들은 섬에 군사 기지를 건설하기로 결정하고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 그 장소는 매우 건강하며, 매우 비옥하고, 매우 풍부한 고기와 생선을 제공한다.”
1664년에 the Oriental Company는 같은 이름을 가진 매우 활동적인 네덜란드 회사와 경쟁할 목적으로 재무장관 콜베르 (Jean-Baptiste Colbert, 1619~1683)가 설립한 명망 높은 동인도 회사 (East India Company)와 합병했다. 콜베르 장관의 꿈은 Fort-Dauphin을 인도양 전체를 무역하는 영향력 있는 항구인 새로운 바타비아(Batavia) (네덜란드 동인도 제도(Dutch East Indies)의 수도, 현재 자카르타)로 바꾸는 것이었지만, 프로젝트에 필요한 자본을 확보하지 못해 그 프랑스 교역소는 침체기를 겪었다.
1674년, 마다가스카르 인구와 프랑스 정착민 사이의 갈등 기간 이후 프랑스 정착민 중 몇몇이 학살당했고, 살아남은 프랑스인 중 다수는 Fort-Dauphin을 떠나 다른 곳, 특히 부르봉 섬에 정착하기로 결정했다.
자금 부족과 프랑스와 네덜란드 간의 사실상 끊임없는 전쟁으로 인해 섬의 개발이 방해를 받았다. 40년 동안 유럽인이 거주한 후인 18세기 초에 이 섬에는 1,100명의 주민이 있었는데, 이 기간 동안 새로운 정착민이 거의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 중 대부분이 그곳에서 태어났다. 사냥감과 과일이 풍부함에도 불구하고 범선의 선장들은 해안을 따라 정박하는 것을 주저했다. 농업 활동이 아직 거의 발전하지 않아 식량 확보가 불안정했기 때문이었다. 40년 동안 프랑스에서 항해해 들어온 선박은 10척, 반대 방향으로 프랑스로 항해한 선박은 20척만이 부르봉 섬에 정박했다. 동인도회사 관리자들과 정착민들은 상황을 개선할 수 있는 변화를 적용할 자금도 의지도 없었다.
회개하는 해적들의 모습으로 변화가 찾아왔다. 1685년경에는 그때까지 아메리카 열대 섬들에 자행되던 대규모 해적 행위가 인도양에서도 활발해졌다. 해적단은 동양 상품을 구매하기 위해 동쪽으로 항해하는 유럽 선박이 값비싼 귀금속을 실은 화물을 운송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지역으로 항해하여 공격했다. 공격 사이에 그들은 유럽과 아시아 사이의 경로에 이상적으로 위치한 마다가스카르 해안을 따라 피난처를 찾고 휴식을 취했다. 또 다른 이점은 그곳에서 더 이상 정의를 적용하는 어떠한 권위도 없다는 것이다. 해적들은 또한 유럽에서 제조된 제품이 필요했다. 돈이 부족하지 않은 그들은 부르봉 섬에 들러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섬의 생활 조건에 매력을 느낀 일부 사람들은 착한 삶을 살기로 결정했다. 1687년, 거버너는 회개한 네덜란드 해적 6명의 정착을 요청하는 내용을 동인도회사 이사들에게 전달했고, 요청은 받아들여졌다. 나중에 “... 이 멧돼지들 (boars)이 주님의 포도나무를 파괴할 것이다” 라는 우려를 표명하는 선교 신부들에게 앙투안 부쉐 (Antoine Boucher) 부총독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들은 부르봉 섬의 최고 주민들이 해적이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2]
1710년, 프랑스 동인도회사 이사들의 요청에 따라, 앙투안 부쉐 (Antoine Boucher)는 부르봉 섬의 각 주민들의 의도에 대한 요약서를 정확한 숫자들과 함께 발행했다. 많은 수가 해적 출신이었다: 121명의 가장 중 40명이나 되었고, 이는 주민의 48%를 차지했다; 그들은 부자였다; 프로방스 출신의 Jacques Siboalle은 13,500 프랑스 파운드를 소유했고, 스코틀랜드 출신의 Rabin은 12,000 파운드를 소유했다. 그들은 자신의 부를 사용하여 노예를 구입하여 땅을 개간하고 농작물 재배를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기업 정신에 기여했고 이는 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에 오스만 튀르크 대사가 루이 14세 궁정을 다녀간 후 모카(커피)에 대한 사랑이 귀족부터 서민으로 급속히 번져갔다.
프랑스 국민의 커피 사랑으로 루이 14세는 모카 수입 판매상에게 세수원는 확보했지만, 사치와 낭비로 얼룩진 그의 삶을 지탱하기에는 부족했다. 왕의 생각은 모카 나무가 자라는 곳과 환경이 비슷한 식민지령에 커피 나무를 심어 산지를 갖고 더 많은 수입을 올려가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식민지령을 관리하고 무역도 할 수 있는 프랑스 동인도회사를 지원해 새로운 커피교역로 루트 개발과 더불어 부가가치를 얻어낼 수 있는 산지를 개발하고자 하는 새로운 생각을 하게 되었다. 루이 14세는 예멘의 술탄에게 커피 나무를 청하고 답을 기다리고 있었고, 프랑스 동인도회사는 모카와 모카 산지에 대한 확보를 어떻게 할 것인가 집중하여 생각했다. ‘우선은 좋은 모카를 찾아야 한다. 사람들이 원하는 좋은 모카 확보가 우선이다. 한시라도 빨리 원정단을 꾸려 출발하자. 좋은 모카를 얻기 위해---’
모카 확보를 위한 첫 원정 (Première expédition à Moka)
프랑스 왕은 Saint Malo의 상인들에게 Godefroy Gollet de la Merveille와 두 명의 선장 Philippe Walsh와 Julien de Champloret-Lebrun (쥴리앙 드 샹플로레-르브룬)의 지휘 하에 원정대를 구성하도록 승인했다.
영국 더블린 태생이지만 프랑스로 망명한 필립 월시 (Phillip Walsh)가 지휘자로 발탁된다. Phillip Walsh는 프랑스 생말로에서 사략선 선장겸 상인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Phillip Walsh는 아일랜드 킬케니 카운티(comté de Kilkenny)의 "Walsh of Ballynacooly" 가문 출신이다. 그는 선박의 선장인 James Walsh와, Margaret Walsh (de Carrickmines)의 아들이다. Walshes는 캄브로-노르만(Cambro-Normans)인이다. 18세기에 그의 후손들은 셰랭(Chérin)이 받아들인 계보를 만들어 그들의 혈통의 고귀함을 확립했다. 원래 웨일스 (Pays de Galles) 출신인 이 가문은 12세기에 아일랜드에 정착했다.
필립 월시(Phillip Walsh)는 1691년 리머릭 조약 (Treaty of Limerick) 이후 1688년 영국 왕 제임스 2세가 폐위되자 아버지와 함께 프랑스로 이주했다. 그는 1695년경 프랑스 생말로(Saint-Malo)에 정착하여 그 세대의 훌륭한 사략 (corsaires 私掠船, 전시에 적선을 나포하도록 정부의 허가를 받은 민간 무장선) 선장 중 한 명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는 무장 선박들에게 영국 제도 해역에서 "소형 사략"를 연습하도록 명령했다. 1691년부터 1708년까지 그는 6척의 사병을 포함하여 생말로에서 11척의 선박을 지휘했다. 역사는 스페인 계승 전쟁 중 인도양에서 Rubis 號 (대포 56문) 및 Diligent 號 (대포 50문)와 함께 한 공적을 기록하고 있다 .
1707년에 그는 보베 르 페르(Beauvais Le Fer)에 고용되어 동인도회사의 첫 번째 Moka 탐험을 위해 Curieux 號를 지휘하게 되었다. 1708년 1월 6일 Phillip Walsh가 이끄는 Curieux號와 Diligent號가 프랑스 브레스트 (Brest) 항구에서 출항한다 ('호기심'號, '성실'號). 이 두 선박은 사략선과 상업선 모두에 적합하고 각각 50문의 대포를 탑재했다. Curieux號는 본래 영국 선박인 것을 나포한 것이었고, Diligent號는 프랑스 생말로에서 직접 건조된 선박이었다.
일단 스페인 카디스 (Cadiz)로 가는 중에 영국 선박 두척을 포획하였다. 그 중 하나는 그곳으로 향하는 리스본 패킷 보트(packet boat, 우편선)였고, 다른 하나는 리스본에서 오는 소금-생선을 실은 배였다 첫 번째는 마스트를 원했기 때문에 750 스털링(영국 파운드화)의 몸값을 받았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녀를 Cadiz로 데려가는 문제를 피하기 위해 15000 리브르를 받고 풀어주었다.
1708년 3월 1일에 카디즈에 도착했다. 아프리카를 돌아 당시 네덜란드 교역소였던 예멘의 Moka로 향하기 전에 스페인 카디스(Cadiz)에서 오랜 체류를 했다. 카디즈에서의 기착은 와인, 그리고 Aqua Vitae (위스키 같은 독한 술) 등의 보급품을 보충하고, 멕시코에서 주조된 스페인 금화 Piastre (피아스트르, 터키, 리비아, 이집트, 시리아, 수단 등지의 화폐단위)를 얻기 위해서였다. 1708년 3월 30일 카디즈를 떠난 원정단 선박들은 카나리아 제도가 보이는 곳을 통과했으며, 물을 얻기 위해 생빈센트(카보베르데 제도)에 며칠동안 정박했다. 6월 2일 대서양 아센시온 섬 (Ascension Island) 근처를 통과하면서, 네덜란드 선박인 Grand Le Vainqueur de Middleboud를 나포했다. 그 선박은 Batavia로 향하면서 식량 등을 보급받기 위해 희망봉으로 가고 있었다. 205명의 남자들이 타고 있었고, 대포 36문을 탑재했었다. 그녀의 화물은 매우 풍부하여 여러 은 상자와 금괴 몇 개를 숨겨 놓았다.
원정대는 타주라 만(Bay of Tadjoura: 지금의 지부티 앞, 홍해 입구의 만)으로 여행했고, 술탄 아파르 메헤메드 이븐 데이니 (Sultan Afar Mehemed ibn Deiny)로부터 안전하게 자신의 영토를 방문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 편지를 받았다. 그리고 원정대의 두 선박은 1708년 12월 홍해 입구인 아덴항에 도착했다. 이 도시 정부로부터 모카의 추천서를 받은 두 명의 말로앵 선장은 모카의 항구로 항해하여 1709년 1월 3일에 도착했다.
원정단이 모카항 네덜란드 교역소에 도착했을 당시에는 모카의 인기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인구가 만여명 정도로 증가해 있었다. 그곳 부두에서 잘 무장된 말 12마리와 팀파니 북 연주자를 선두로 하는 군인 200명를 발견했다고 한다. 그들은 이 화려함과 함께 해당 통치자의 궁전으로 옮겨졌으며, 그곳에서 첫날부터 모든 조건과 모든 상업 관세가 3%로 규제되는 조약이 체결되었다.
모카에 대한 거래를 마친 후 귀향하던 모카 원정단이 마다가스카르의 Mahajanga에 잠깐 들렀을 때, 필립 월시는 황열병에 걸리고 만다. 1708년 9월 11일 필립 월시는 모카 원정의 사명을 다하지 못한 채 사망한다. 리더를 잃은 모카 원정단이 1710년 5월 8일 생말로에 도착했을 때, 그 배에는 대략 1,300톤의 커피가 실려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또 다른 40문의 네델란드 선박 Esquiviv를 몰디브 제도 부근에서 나포하기도 했다.
원정대가 귀환하여 생말로에 상륙했을 때, 이 모험의 선두에 선 딜리전트 호의 선장인 줄리앙 르브룬 드 샹플로레는 루이 14세의 대신이었던 퐁샤트레인 총리의 요청에 따라 그의 여행에 대한 전체 기록을 작성해야 했다. 그러나 지치고 병들어 이 명령을 지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원정대의 상업 업무를 담당하는 화물관리인 Godefroy Gollet de La Merveille가 이 임무를 완수하게 된다. 1711년 Le Nouveau Mercure에 실린 그의 짧은 이야기는 작가 Jean de la Roque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고 나중에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의 교류를 바탕으로 Jean de la Roque는 Malouins의 희망봉을 거쳐 예멘으로의 첫 번째 여행과 두 번째 원정에 대한 자세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확실히 La Merveille에 의해 희석된 이 여행 설명 (Voyage de l'Arabie Heureuse)은 당시 이국적인 이야기를 매우 좋아했던 대중에게 큰 성공을 거두었다. Jean de la Roque는 또한 이 작업에서 커피의 역사와 식물학에 관한 논문도 제공하고 있다. 관심있는 독자들은 Gallica/BnF에서 디지털화한 1716년 파리판을 참조할 수 있다.
1708년 1월 6일 | Champloret 선장과 Phillip Walsh선장이 지휘하는 Curieux號와 Diligent號 두 대의 선박이 브레스트港(프랑스)에서 출항. |
1708년 2월 | 영국 선박 2척을 포획, 몸값 받고 풀어줌. |
1708년 3월 1일 | Cardiz (스페인) 도착. 와인, Aqua Vitae 등 보급, 멕시코에서 주조된 스페인 금화 Piastre 마련. |
1708년 3월 30일 | Cardiz (스페인) 출항, 카나리아 제도로 향함. |
1708년 6월 2일 | 아센시온 섬 (Ascension Island) 앞바다에서 Curieux號가 네델란드 선박 Grand Le Vainqueur de Middleboud (대포 36문)과 전투 및 점령. 포로 205명, 은상자 및 금괴 등 화물 압수. 원정단에 편입. |
1708년 7월 7일 | 희망봉 (Cape of Good Hope) 통과. 네델란드에 알리지 않기로 결정하고 St. Lawrence (Madagasgar 섬)으로 출발. |
1708년 8월 10일 | Massali港 (=Majunga 마하장가: Madagasgar) 도착. 선원들을 육지에 배치, 보급품 확보 허가를 받음. |
1708년 9월 11일 | Massali港 (Madagasgar)에서 Phillip Walsh 선장 병사 |
1708년 9월 23일 | Massali港 (Madagasgar)에서 Grand Le Vainqueur de Middleboud의 네델란드인 80명을 남겨두고 출항. |
1708년 10월 5일 | Anjuan (Comoro제도의 섬) 정박. |
1708년 11월 28일 | 소코트라(سقطرى, Socotra)섬 (인도양의 아프리카 뿔 근처에 위치한 예멘의 섬) 도착. |
1708년 12월 10일 | 소코트라에서 출항. |
1708년 12월 13일 | 과더퓌곶 (Cape Guardafui or Marinka Gardafuul)= 소말리아 아프리카 뿔 지역의 맨 끝에 위치한 곶)을 빠르게 통과, 소말리아 해안을 따라 순항. |
1708년 12월 18일 | 아덴 (Yemen)에 정박. |
1708년 12월 27일 | 보급품 보충한 원정대, 네델란드 직물 일부를 판매, 아덴만을 출발. 아덴만 바닥 정찰위해 아랍인 항해사를 승선시킴. |
1709년 1월 1일 | 라헤이타灣 (Rahaita or Raheita (راهيتا, 지금의 Eritrea 남부 홍해 지역, Moka에서 볼 때는 홍해 남서쪽 건너편)에 정박 |
1709년 1월 3일 | Moka에 도착. Saleh el Hareby 거버너를 방문. |
1709년 1월 16일 | Moka 거버너 Saleh el Hareby와 교역조약 체결. 안정적 가격의 커피 직접 수출을 허용. |
1709년 8월 20일 | Moka 출항, 생말로로 향함. |
1709년 9월 18일 | 몰디브 해안에서 네델란드 선박 Le King號 (대포 42문)과 치열한 전투 끝에 나포. 화물(20만 금괴, 은상자, 금상자 포함) 압수, 선원 나포. |
1709년 12월 18일 | 생드니港 (라레위니옹섬)을 떠남. |
1710년 5월 21일 | 원정대, 생말로港 (프랑스) 귀환. |
1711년 1월 4일 | Lande와 Briselaine 선장이 지휘하는 La Paix號와 Le Diligent號는 제2차 생말로 탐험(모카 원정)을 위해 생말로를 떠나 예멘으로 출항. |
~1711년 10월 5일 | 2차 말로인 원정대는 수비대의 소령이며 외과의사인 그렐로디에르(Grelaudière)가 승선한 후 퐁디셰리(Pondicherry)를 출발 |
1711년 11월 18일 | 프랑스 원정대 함대(5척)가 아덴에 도착 |
1711년 12월 2일 | 프랑스 원정대 함대가 모카에 정박 |
1712년 2월 14일 | 프랑스 대표단(Pondichry 수비대 소령 Monfieur de la Grelaudiere, Le Diligent號의 차석 외과의사 Sieur Barbier, 기타 수행원들)는 예멘 왕(이맘) 알-마와히브(Ṣāḥib al-Mawāhib)를 만나기 위해 호위를 받으며 말을 타고 모카를 떠난다 |
1712년 3월 | 프랑스 대표단이 왕이 거주하는 무압에 도착하여, 외과 의사 Barbier는 Mouab의 이맘 Ṣāḥib al-Mawāhib를 치료. 왕은 Grelaudière에게 Louis XIV, 궁정 및 프랑스에 대해 질문 |
1712년 3월 18일 | 프랑스 대표단(그렐로디에르, 외과의사 바비에르 등)는 선물를 가득 받고 무압을 떠나 모카로 출발 |
1712년 3월 27일 | 프랑스 대표단(Grelaudière 소령 등)이 Moka (예멘)에 도착 |
1712년 7월 10일 | 커피를 가득 실은 프랑스 함대가 모카에서 출항 |
1713년 6월 11일 | 프랑스 모카 원정대 생말로 귀환 |
1716년 | Laroque가 Merveille의 예멘 여행 문서인 『Voyage de l'Arabie Heureuse』를 출판 |
그로부터 3년 후 1710년 12월 2일 앙투안 크로자(Antoine Crozat)의 《Crozat 회사》에 의해 두번째 모카 원정단이 결성되었다. 1711년 1월에 Briselaine과 Lande 선장이 지휘하는 Paix號와 Dilignet號 두 척의 선박으로 ('평화'號, '성실'號) Saint-Malo에서 Moka를 향해 출항했다. 당시 홍해에서의 선박 항해를 방해하는 무역풍을 감안하여 일단 인도의 퐁디셰리 (Pondicherry)로 출발했다. 거기서 퐁디셰리 수비대 소령이자 보건장교였던 Monfieur de la Grelaudiere가 합류한다. de la Grelaudiere는 아랍어를 잘 구사할 수 있었으며, 원정대에 누구보다 더 유용할 수 있는 위치에 있게 되었다. 그는 생말로 원정대 함대가 나포한 네덜란드 선박 중 하나인 보파르테르(Beau-Parterre)號의 책임자로 임명되어 모카 원정대에 합류했다.
그들은 그 도시의 통치자로부터 가장 친절한 환영을 받았다. 원정대 선박에 승선했던 외과 의사는 귀에 농양을 앓고 있는 예멘 왕국의 군주를 치료할 기회도 얻었다. 예멘은 당시 군주를 이맘이라고 불렀다. 그 이맘의 이름은 Al-Mahdi Muhammad bin Ahmed (October 27, 1637 – August 2, 1718)이다. Ṣāḥib al-Mawāhib라고도 알려져 있는 이맘이었다. 그는 1689년부터 1718년까지 통치한 예멘의 이맘이었다. 이슬람 예언자 무함마드의 후손이며, 1597년부터 1962년까지 자이디 이마메이트(이맘이 통치하는 이슬람 신권국가)를 지배했던 카시미드 가문에 속했다. 모카에 도착한 원정대는 예멘 측의 요청을 받고, 예멘 왕에게 보낼 대표단을 꾸려 보낸다.
이 대표단에는 Pondichry 수비대 소령 Monfieur de la Grelaudiere과, Diligent號의 차석 외과의사 Sieur Barbier, 그리고 기타 수행원들이 포함되었다. 대표단은 모카에서 출발하여 Taiz와 Jiblah, 그리고 Djamar를 거쳐 1712년 3월 예멘 왕(이맘)이 거주하는 무압에 도착했다. 외과 의사 Barbier는 이맘을 치료해주었다. 무압은 al-Mawahib라는 곳으로 Djamar 동쪽에 이맘이 마련한 거주지였다.
이맘은 프랑스 대표단에 대한 감사로 이 나라 최고의 커피 500 자루를 포함한 엄청난 선물을 제공했다. 예멘 왕은 de la Grelaudiere에게 커피나무도 주었으나, 연약한 뿌리를 보호하고 영양을 공급하기에 충분한 양의 흙이 없어 아라비아 땅에서 채취된 이 어린 나무는 많은 보살핌에도 불구하고 횡단 중에 죽었다.
몇 개월이 지난 1713년 6월에서 7월 말 경 생말로로 복귀했다. 원정단의 선박들에는 1,600 톤 가량의 커피가 실려 있었다. 원정단은 네델란드 노획물 'Beau-Parterre'號와 영국 노획물 'Princesse'號를 추가하여 1713년 6월~7월에 생말로로 돌아왔다. 또 다른 영국 노획물 '앤 여왕 (la Reine-Anne)'號는 인도에 매각되었다. 두 척의 배를 가지고 떠났던 생말로의 원정단은 네 척의 배를 가지고 돌아온 것이다.
이 두번째 원정에 관해 Abbot Manet은 “우리 항해사들은 여행의 특별한 목적이었던 다양한 상품 외에도 아라비아 펠릭스에서 지리적, 역사적, 항해적 통찰력도 가져왔다"고 평가했다. “우리는 특히 가장 잘 알려진 모카 커피 나무의 나무와 열매에 대한 정확한 관찰을 그들 덕분에 가지게 되었다. 그들에 따르면 이 나무는 일반적으로 높이가 6피트에서 12~18피트까지 자라며, 크기는 둘레가 12~15인치라고 한다. 완벽한 상태에서는 가지가 줄기를 따라 배열되어 있고 가지마다 잎이 거의 반대쪽에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8~10년 된 사과나무와 거의 파라솔 역할을 한다. 나무는 매우 부드럽고 매우 유연하여 가장 긴 가지의 끝이 땅에서 2~3피트까지 올라갈 수 있다. 나무는 거의 모든 계절에 한 번에 모든 잎을 흘리지 않는다. 일년 내내 우리는 그곳에서 꽃과 과일을 본다. 이 꽃은 흰색이고 재스민과 비슷하며 기분 좋은 냄새가 난다. 그들은 잎의 꼬리와 가지의 교차점에서 태어난다. 떨어지자마자 그 자리에 작은 열매가 맺히는데, 처음에는 매우 녹색이었지만, 익으면서 빨간색이 되고, 대략 큰 체리 모양을 하고 있다..." 이것이 Malouins의 Moka에 대한 두 번의 훌륭한 원정이었다.
이 두번째 Moka 탐험은 커피의 맛과 대규모 재배 가능성을 궁정에 소개했고, 그곳에서 Antoine Crozat가 높이 평가되었다. 첫번째 원정 이후 3년이라는 시간동안 프랑스인들은 맛있는 모카의 맛을 알기 시작했고, 유럽의 카페들이 만들어내는 모카의 문화를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두번째 원정 이후 루이 14세와 프랑스 동인도회사는 커피를 사들여 교역하기 보다는 훌륭한 산지를 가져야 한다는 강렬한 욕망이 들끓었다. 그리고 루이 14세와 프랑스 동인도회사는 인도양의 섬 하나를 떠 올린다. 부르봉섬이었다! 당시 부르봉 섬으로 불리며 인구가 734명에 불과했던 레위니옹 섬의 경사면은 예멘 산지의 기존 모카 작물을 복제하기에 적합하다고 결정되었다. 이에 왕은 이미 떠난 모카의 3차 원정대에게 부르봉 섬에 커피 재배를 정착시켜 보살펴 줄 것을 요청했다.
“끝없이 뻗어 나가는 커피 농장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습니다.”
- 1728년 거버너 뒤마 (Dumas)가 이사들에게 한 연설 -
그 브리핑은 부르봉 섬 개발에 대한 프랑스 동인도 회사 이사들의 새로운 관심을 입증한다. 이 기간 동안 인도 동부와 프랑스 사이의 무역 독점권이 금융가 앙투안 크로자(Antoine Crozat)와 연합한 생말로(Saint-Malo)의 선주 그룹에게 이전됨에 따라 재정 상황이 개선되었다.
앙투안 크로자 (Antoine Crozat)와 그의 형제 피에르 크로자 (Pierre Crozat)는 프랑스 툴루즈(Toulouse)에서 부유한 금융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들은 1700년경에 파리로 이주하여 무명에서 벗어나 프랑스에서 가장 부유한 금융가 중 두 명이 되었다. 정부에 돈을 빌려주는 방식으로 앙투안은 샤텔 후작(Marquis of Châtel)이라는 칭호를 얻었고, 이 칭호는 그의 장남 루이 프랑수아에게 물려주었다. 1705년에 그는 루이 14세의 재정 고문 겸 비서직을 샀다. 루이 14세 통치 말기에 프랑스에서 가장 많은 재산을 소유한 사람이었다.
1709년 12월, 동인도회사의 이사들은 " 더 정확하고 신뢰할 수 있는" 정보를 얻기 위해 회사 사무총장의 아들인 루이 보뱅 하당쿠르 (Louis Boyvin d'Hardancourt)를 “프랑스 동인도회사 시설 방문 총책임자”로 임명했다. 루이 보뱅 하당쿠르는 1711년 4월 11일부터 9월 3일까지 부르봉 섬에 머물면서 영토 전체를 방문했다. 그리고 자크 오베르(Jacques Auber)가 조직한 생뽈 (Saint Paul) 고지에서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동안 그들과 동행한 하인 중 한 명이 그의 옷 주머니에서 콩을 꺼냈는데, 하당쿠르(Hardancourt)는 즉시 커피 체리라고 식별했다. 그들은 즉시 현장으로 돌아가 생산 중인 관목을 찾았다. Hardancourt는 이미 땅에 떨어진 체리를 따고 잘 익은 열매를 따왔다. 그는 두 묶음을 만들어서 파리로 가져왔다. 이것은 부르봉 브라운 커피의 발견으로, 1783년 Lamarck에 의해 확인되었으며 그는 Coffea mauritana Lam.이라는 학명을 부여했다.
체류 후 Hardancourt는 두 가지 제안을 발표했다.
1° “부루봉 섬에 항구를 만드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나는 몇 년 전(1710년) 네덜란드인들 떠나고 버린 (네덜란드인들은 1710년에 떠났음) 모리셔스 섬 (island of Mauritius)을 살펴보게 되었다. 나는 프랑스 동인도 회사가 그곳에 위치한 두 항구에서 안전하게 선박을 정박할 수 있도록 탄탄한 기반을 마련하는 것보다 더 나은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2° 나는 섬에 커피를 심는 것이 성공할 것이라는 점을 의심한 적이 없습니다. 이에 대한 증거는 내가 발견한 생뽈 (Saint-Paul) 뒤의 평평한 산 지역에서 자라는 야생 커피 나무의 존재입니다.”
회사가 승인하고 왕 의회의 승인을 받은 이 두 가지 제안은 즉시 실행되었다. 즉, 커피나무 운송과 모리셔스 섬 점령 계획의 명령이 전해진 것이었다.
두번째 원정 3년 후 1714년 3월 21일 기욤 두프레네 다르셀 (Gillaume Dufresne d’Arsel)이라는 선장의 지휘 아래 Chasseur號와 라몽쏠리에르 (La Mancelière) 출신의 선장이 있는 Paix號 두 척으로 구성된 세번째 모카 원정단이 출발한다 ('사냥꾼'號, '평화'號). 순조롭게 항해하던 1715년 6월 27일 예멘으로 향하는 또 다른 선박인 드 라 부아시에르 (de la Boissiere) 선장의 L’Auguste號 ('10월'號)에 의해 왕실의 명령이 전달되었다. 부르봉 섬에 커피나무 농장을 구축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작 명을 내린 루이14세는 결과를 지켜보지 못한다. 그로부터 9개월 후 세번째 모카 원정의 임무가 채 완료되기도 전에 루이 14세는 77세의 일기로 생을 마쳤기 때문이다
1714년 모리셔스 섬의 소유권을 확보하라는 왕립 정부의 명령이 내려졌다. 해군 장관 드 폰차트레인 (Jérôme Phélypeaux de Pontchartrain)은 이 섬이 무인도인 경우 왕의 이름으로(au nom du roi) 가서 모리셔스를 점령하도록 명령한다. Saint-François 거리에 있는 본사에서 열린 대의회에 모인 생말로의 선주들 (malouins armateurs)은 왕이 방금 그들에게 맡긴 임무를 확실히 가장 숙련된 사람 중 한 명인 Guillaume Dufresne 선장에게 맡기기로 결정했다. 듀프레인 선장은 말로앵의 2차 모카 원정대에 참가했던 경험을 가진 사람이었다.
이것이 회사가 Auguste號 선박에 탑승한 또 다른 생말로 출신의 캡틴 드 라 부아시에르 (de la Boissière)에게 1714년 10월 31일 날짜의 de Pontchartrain의 편지를 전달하고 생말로 사람들에게 모리셔스의 소유권을 맡긴 이유이다.
모리셔스는 아랍인들의 지도에서 처음으로 'Dina Arobi'로 알려졌었다. 이 섬은 1505년에 포르투갈인에 의해 공식적으로 발견되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Don Pedro Mascarenhas는 근처의 3개 섬인 모리셔스(Mauritius), 레위니옹(Reunion), 로드리게스(Rodrigues)를 마스카렌 제도라고 명명했다. 그러나 포르투갈인들은 모리셔스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네덜란드인들이 1598년에 처음으로 이 섬에 상륙했고, Maurice Van Nassau 왕자를 기리기 위해 섬은 "모리셔스"로 명명되었다. 모리셔스에 처음으로 네덜란드인이 정착한 것은 1638년이었다. 그들은 이 섬 고유의 날지 못하는 새인 도도새를 발견했다. 도도새는 네덜란드인과 그들에 의해 유입된 다른 동물을 포함한 수많은 포식자 때문에 멸종되었다. 네덜란드인들은 또한 나중에 섬의 주요 작물이 된 사탕수수 식물을 도입했다. 네덜란드인들은 1710년에 마침내 섬을 떠났다.
받은 명령에 따라 Chasseur號의 Saint-Malo 출신의 선장인 기욤 뒤프레인 다르셀 (Guillaume Dufresne d'Arsel)은 1715년 9월 모리셔스섬의 북서쪽 항구로 상륙했다. 그는 하선하자마자 승무원을 파견하여 탐사에 나섰고 대포를 여러 차례 발사했다. 산과 숲에 숨어 있던 블랙 마룬들(Noirs Marrons)은 큰 흥분을 불러일으키는 이 시끄러운 시위에 반응하지 않도록 조심했다. 확인하기 위해 며칠을 기다린 후, 1715년 9월 21일 뒤프레인은 왕의 명령에 따라 엄숙하게 섬을 점령했다. 장관의 명령에 따라 '일 드 프랑스 (Ile de France, 프랑스 섬)'라는 이름을 부여했다. 6년 후 1721년에 프랑스인들이 점령을 시작했다. "프랑스 섬"이 효과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1735년부터 프랑스 총독 마헤 드 라 부르도네 (Mahé de La Bourdonnais)가 도착하면서부터였다. Mahé de La Bourdonnais는 "Jardin Pamplemousses" 에 후추, 계피, 정향과 같은 향신료를 심었다. 그는 또한 포트 루이스를 해군 기지와 조선 중심지로 설립했다. 그의 통치 하에 수많은 건물이 지어졌으며, 그 중 다수는 정부 청사의 일부였고, Pamplemousses의 Château de Mon Plaisir 및 Line Barracks 등 오늘날에도 여전히 남아 있다.
또 다른 배는 Moka로부터 60그루의 커피나무를 가져와 1715년 9월 Bourbon에 상륙했다. 이 여행에서 살아남은 20그루의 나무 중 2그루만이 뿌리를 내리며 ‘Bourbon rond’ 품종의 커피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현지의 ‘Bourbon pointu’ 계열의 재배는 소출이 불규칙하고 아로마가 거의 평가되지 않았기 때문에 포기되었다.
1708년 프랑스인들은 처음으로 일부 커피 씨앗과 60그루의 커피 나무를 "부르봉 섬"으로 가져왔지만 재배 시도는 비참하게 실패했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이 1715년의 부루봉 섬으로의 커피 도입 역사에 관한 관련 자료들이 두 가지로 혼동되어 기록되어 있다. 하나는 커피나무를 도입한 선박은 드 라 부아시에르(Mr. de la Boissière--Tréhouard)가 지휘한 오귀스트(Auguste)號였다. 5월 23일 모카(Moka)에 도착한 오귀스트號는 7월 29일에도 그곳에 있었고, 9월말 경에 부르봉에 도착했다. Boissière 사령관은 Saint-Paul에 6개의 상자, 즉 6개의 반-통을 하역했는데, 각 상자에는 겉모습만으로도 주민들의 관심을 끄는 관목이 들어 있었다. 즉, 6그루의 커피나무들이 도착했다는 기록이다. 그 섬에 존재하는 유사한 종과의 유사성은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비교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연구가 진행되었고 모두가 기쁘게도 부르봉 섬이 야생에 커피나무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모카로부터 부르봉에 도입된 커피나무들은 결국 단 2그루만 최종적으로 살아남았다는 기록들을 찾아볼 수 있다. 그 중 한 그루는 Saint-Denis에 거주하는 Laurent Martin에게 맡겨졌고, 다른 하나는 Sainte-Suzanne의 신부인 Mr. Houbert에게 맡겨졌다. 1719년에 이 커피나무에서 나온 최초의 콩이 피아스트레당 16개에 팔렸다.
Albert Lougnon의 『L'île Bourbon pendant la Régence, Desforges-Boucher, les débuts du café』에 보면, Chasseur號는 "1715년 9월 25일 생폴(Saint-Paul)에 닻을 내려 모카(Moka)에 선적한 커피나무 60그루 중 20그루를 그곳에 내려놓았고 나머지는 모두 죽었습니다."라고 전하고 있다. " Chasseur號가 하역한 Moka에서 온 커피나무 20그루 중 1715년 9월 말까지 18그루는 이식을 견디지 못했으며, 생드니에 거주하는 마틴 형제의 보살핌을 받은 마지막 두 그루는 1717년 9월 마침내 꽃으로 뒤덮였다. 1718년 초에 수집된 씨앗 중 605개가 생드니 주민 32명에게 배포되었다. 그 중 450개가 마틴 형제에게, 78~23개는 생트 수잔(Sainte-Suzanne)에서 온 정착민들에게 배포되었다. 씨앗 484개가 싹이 트지 않았고 나머지 199개 82개가 여전히 그루터기 자체가 파괴되었다. 거의 사라졌다”(p. 115). "1719년 1월, 마틴 형제의 커피나무는 두 번째로 잘 익은 씨앗을 생산하기 시작했습니다. 7월까지 배포가 이루어졌다. [...] 2,693개의 씨앗이 123명의 주민에게 배포되었다. [...] 전년도 농장의 생존체 117그루과 함께, 779그루의 개체로 늘어났으며, 1719년 말에 총 896그루의 자손을 낳았다. 1720년 5월, 세 번째 수확에 [...] 이번에는 15,000개의 씨앗을 심었고 10월에는 7,000그루의 나무를 생산했디." (p.151)
1715년 12월 4일 , Henry de Justamond은 지방 의회에서 15세 이상의 백인이든 흑인이든 식민지의 모든 남성이 숲에서 가져올 100그루의 커피 나무를 심겠다는 결정을 승인하게 했다. 부루봉에서는 'café marron'이라는 토착 커피가 많이 발견되었다. 이 커피는 모카보다 조금 크고 끝이 뾰족한데, 그 모양 때문에 café Bourbon pointu라고 불렸다. 버번은 야생 향이 나는 커피를 계속해서 믿었으나, 유럽 고객들은 진짜 아라비아 커피인 서인도 커피를 선호하며 삐죽거렸다.
세번째 Moka 원정단은 1716년 2월 생말로로 돌아왔다.
1717년, Bourbon의 café marron은 현재 재배되고 있지만 야생적인 맛을 유지하고 있어 프랑스에서는 가치가 떨어지고 품질이 떨어지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서인도 제도는 아라비아에서 채취한 종을 대량으로 공급했는데, 품질이 우수하여 선호도가 높았다. 회사는 일정량의 아라비아종 나무를 섬에 도입함으로써 부루봉 커피를 공격할 위협이 되는 불신을 예방해야 했다. 이를 위해 부르봉 거버너 조제프 드 보볼리에 드 쿠르샹 (Joseph de Beauvolier de Courchant)은 Dufougerais Garnier 선장과 함께 Triton號의 홍해로 파견되었다. 그들은 별로 어려움 없이 적절하게 준비된 모카 커피 나무의 식물과 씨앗을 구하고 모든 것을 가져왔다. 프랑스 왕실의 중위인 데포르지 부셰 ( Desforges Boucher)에게 맡겨진 이 나무들은 1720년에 이 나무들은 생뽈에 총 7,500 그루의 커피나무를 심을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열매를 가져왔다.
나중에 그 섬의 주지사가 된 부지사인 앙투안 부쉐 (Antoine Boucher)는 이사들의 조바심을 진정시키고 완강하게 작물 개발을 계속 했다. 1723년 1월 17일 Desforges Boucher로 알려진 Antoine Labbé가 Bourbon Island의 거버너(총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이미 섬에 주둔하고 있었으며 그곳에서 임명된 최초의 직함 총독이었다. 그는 1723년 8월 23일 이 임명에 대한 정보를 받고 부르봉 거버너(총독)으로 취임했다.
첫 번째 화물 (무게 3,400파운드)은 1724년에 섬을 출발했다. 이후 급속한 성장 기간을 거쳐 1727년에 100,000파운드에 이르렀다.
1728년 , Pierre-Benoît Dumas 총독은 커피 재배를 강화했다. 그는 1728년 4월 27일 장관에게 "무한히 늘어나는 커피 농장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습니다. 이 섬은 곧 왕국이 소비하는 것보다 더 많은 커피를 공급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라고 썼다. Benoît Dumas는 부루봉의 노예 수를 늘리는 데 관심을 가졌다. 1728년 4월에 그는 폰디체리(Pondicherry)로 여행을 떠났고 약 200명의 노예를 데려왔다. 그는 또한 모잠비크와 세네갈에서도 일부를 데려왔다.
거버너 Beauvollier de Courchant (1718-1723)와 Desforges Boucher (1723-1725)의 정력적인 행동은 식민지 주민들의 초기 거부감을 극복하고 커피 생산량의 급속한 성장과 프랑스로의 커피 수출을 가져왔다 (1723년 이후 회사 독점).
“마침내 농작물이 성공했고 회사는 이제 풍성한 수확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루어진 투자를 커버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1734년에 900,000 파운드를 하역한 후 이사들에게 이렇게 썼다. 회사는 1740년에 1,500,000 파운드, 1744년에 2,500,000 파운드를 인도 받았고 그 이후 몇 년 동안 연간 생산량은 2,000,000 ~ 2,500,000 파운드에 달했다.
정착민들이 점차 생뽈 (Saint-Paul)과 생드니 (Saint-Denis)에서 이주하면서 부르봉 섬 주변의 해안 평야 전체가 점진적으로 변화되었다. Saint-Louis와 Sainte-Suzanne 교구들이 1728년에, Sainte-Marie는 1733년에, Saint-Benoît는 1734년에, Saint-Pierre는 1735년에, Saint-André는 1740년에 만들어졌다.
농업은 풍경을 변화시켰다. 해안을 따라 토지 측량사는 ‘Company paces’를 측설했는데, 후자는 적의 공격이 있을 경우 방어에 기여할 목적으로 ‘직립 목재’로 보호되는 약 80m 길이의 50보 길이의 땅이다. 이 부지부터 산간지대의 바깥 경계인 ‘cliff (절벽)’ 기슭까지 이어지는 나머지 땅은 ‘분양구역(concessions)들’로 나누어졌다. 이 땅은 25~125m의 상당히 좁은 띠 모양의 땅이었지만, 매우 길었고 때로는 두 도랑 사이의 전체 지역을 덮고 있었기 때문에 때로는 수 킬로미터에 달하기도 했다. 각 지역의 면적은 매우 다양했으며, 1732년부터 새로 경작된 지역에서 측량사는 회사의 요청에 따라 소규모 분양구역 (concession)을 만들기 위해 100, 200, 400 및 600m의 고도들에서 해안에 그리고 ‘Company paces’에 평행한 4개의 선을 그렸다. 오늘날까지도 이러한 곳은 구역들 사이의 경계를 형성하고 지금은 길이나 도로로 표시되기 때문에, 현재의 토지 분할에서 여전히 표시되는 경우가 많다.
1773년과 1778년 센서스에서 자세히 설명된 구역들의 크기에 대해 Jean Defos du Rau가 수행한 연구는 그 크기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공한; 그것들 중 5 헥타르가 26.2%, 5~10 헥타르가 10%, 10~20 헥타르가 40.1%, 20~100 헥타르는 21.2%, 그리고 100 헥타르 초과인 경우가 2.5%였디 [6]. 2,500 헥타르가 넘는 대규모 에스테이트는 거의 없었으며 이들은 항상 서로 분리된 여러 개의 분산된 구역들로 형성되었다.
“당신들 기쁨의 원천은 우리의 눈물로 적셔졌습니다.”
J.-M. Moreau (a.k.a. ‘le jeune’)
이제 수가 많아진 노예들은 땅을 개간하고 농작물을 재배하게 되었다. 1664년 동인도 회사가 설립되었을 때 군주제는 노예 제도를 금지했다 :
해당 국가의 주민을 노예로 판매하는 것은 명시적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그렇게 하는 사람은 사형에 처해질 수 있으며, 그들을 고용하거나 서비스에 유지하는 프랑스인은 그들을 성추행이나 모욕 없이 인도주의적인 방식으로 대우하거나 달리 체벌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첫 번째 센서스에 열거되었던 ‘하인들(servants)’은 노예와 가까운 생활 방식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노예 slave’라는 단어는 1690년 공식 서신과 1713~1714년 센서스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커피 재배가 발전함에 따라 프랑스 동인도 회사의 이사들은 인도양 섬에서 노예 제도를 시행할 수 있도록 하는 규제 문서를 왕에게 요청했다. 1685년 아메리카 섬들을 대상으로 발행된 ‘코드 느와르 Code Noir’ (블랙 코드)에 크게 기반한 이 텍스트는 1723년 12월에 발표되었다.
그때부터 그 회사는 연례 노예 무역 원정대들을 조직하여 지주들에게 노예를 판매했다. 1723년에는 대략 600명의 노예가 있었고 총 인구는 1,200명이었다. 1730년에 이 섬에는 4,000명의 노예가 있었는데, 이는 전체 인구 4,800명의 80% 이상을 차 지했다. 18세기 내내 동일한 비율이 유지되었으며, 1740년에는 인구 10,000명에 노예가 8,000명 있었다. 1750년에는 11,000명에 13,500명으로; 1764년에는 20,000명에 15,800명이었다.
이 섬의 노예는 주로 마다가스카르에서 유래했다(1735년 64%). 그 회사는 현재 타마타브(Tamatave) 항구 북쪽에 있는 풀포앙트 (Foulepointe)에 상임 오피서와 함께 전초 기지를 유지했다. 마다가스카르에서 붙잡힌 노예가 선호되었는데, 그 이유는 프랑스 정착민들이 항상 프랑스 정착민들에게 노예들이 배를 훔쳐 고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두려워했지만, 바다를 건너오는 중에 사망자들이 적었기 때문이었다 (아프리카 동해안으로부터의 항해 중 사망자 수는 21%에 달했고, 유럽인들의 수는 12%에 가까웠다). 18세기 후반에, 혼혈인이 조금씩 인구의 중요한 소수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1762년에는 30% 이상). 인도 출신의 노예는 거의 없었으며 (항상 5% 미만), 그들을 노예로 간주할지 자유 장인으로 간주할지 여부에 대해 자주 주저했다. 이 기간 동안 사실상 노예가 해방되지 않았으며 회사는 이에 반대했다.
노예의 운명은 그들의 지위와 그들을 사용하는 착취의 유형에 따라 매우 달랐다. 노예 집단의 수와 비율은 이제 자유인보다 더 빠르게 증가하고 있었고, 인신매매 장소의 지리적인 다양화도 분명했다. 마다가스카르는 "곡괭이 흑인"에 대한 수요 증가로 인해(커피로 인해) 아프리카(주로 동쪽에서)로 대체되었다. 인도 무역은 주로 재능 있는 노예(특히 아가마스(argamasses)를 만드는 장인)를 제공했다. 아가마스는 '커피를 햇빛에 말리는 평평한 장소'로서, 일반적으로 직사각형 모양으로 되어 있으며 옥상 테라스가 있는 건물의 지붕 에 설치되는 경우도 많다. 인도-포르투갈어 유래의 여성 이름(argamassa), argamasse 또는 argamaste(Creole argamass , largamass)에서 유래된 용어이며, 모래, 으깬 벽돌, 석회, 달걀 흰자, 응유, 지방으로 만든 모르타르이며 벽과 옥상 테라스를 코팅하는 데 사용되었다. 18세기에 부르봉 커피 재배가 발전하면서 Compagnie des Indes는 인도 장인들을 부르봉 섬으로 데려왔고, 그곳에서 모르타르 혼합법을 전수받았다.
일상 생활 조건은 1723년에 발표된 칙령에 명시되어 있다. 카리브해에서와 마찬가지로 노예는 '소속물'로 간주되었으며 법적 능력이 있는 것으로 인정되지 않았고, 제한된 ‘수당(allowance)' 외에는 재산에 대한 권리가 없었다. 주인은 노예의 행동에 대한 책임이 있었고, 그들의 보호와 식량을 제공해야 했다. 칙령에 명시된 일일 식량 양은 남자의 경우 쌀 1.5파운드, 여자의 경우 1파운드였다. 주인은 늙었거나 장애가 있는 노예를 부양할 책임이 있었다. 노예는 종교 교육을 받아야 했으며 일요일이나 종교 휴일에 일을 시켜서는 안 되었다. 남편, 아내, 자녀를 별도로 판매하는 것은 금지되었다. 처벌은 태형으로 제한되었지만, 절도, 무단 집회 또는 탈출 시도의 경우 더 엄격한 처벌이 가해졌다.
이러한 법적 요소로 실제 생활 조건을 평가하는 것은 어렵다. 나중에 그의 가혹함 때문에 비난을 받은 한 마스터가 쓴 다음의 글은 우리에게 몇 가지 아이디어를 줄 수 있다.
Desruisseaux 수녀님의 흑인에 관한 규정입니다.
- 제1조, 주인이나 그 대리인의 허락 없이 밤에 나가는 흑인은 첫 번째 위반 시 지하 감옥에서 하룻밤을 자고 두 번째 위반 시 8일, 세 번째 위반 시 한 달, 네 번째 위반 시 한 달 동안 사슬에 묶이게 된다.
- 제2조. 이웃이나 주인의 물건을 훔치다 적발되면, 1차 위반 시 8일, 2차 위반 시 15일, 3차 위반 시 14일 동안 감금된다.
- 제3조. 탈옥을 시도하는 자에게는 1차 채찍질 30대를 처하고, 2차 탈옥 시 15일간 사슬에 묶인 후 1개월간 지하감옥에서 잠을 잔다.
- 제4조. 흑인이 주인의 허락 없이 동료들과 중고거래를 하고, 매매를 하는 자는 채찍 30대에 처한다.
- 제5조. 흑인은 감독이라도 어떤 이유로든 주인의 허락 없이는 다른 곳에서 잠을 잘 수 없다. 퇴근 후 다른 곳에서 자고 싶은 사람은 주인이나 그의 대리인에게 알리거나 첫 번째 위반 시 채찍질 20대를 받아야 한다.
- 제6조. 나의 흑인 노예는 주인에게 알리지 않고는 자신의 집이나 오두막에서 외부 흑인을 받아들일 수 없다.
- 제7조. 내 집에서 도둑을 잡는 보호자에게는 손수건을 보상으로 드린. 도둑이 도망친 노예라면 후견인이 그 사람을 지켜줄 수도 있다.[9]
처벌에도 불구하고, 섬의 높은 지역의 고르지 못한 지형에 고무된 노예들은 계속해서 탈출을 시도했다. 도망자의 정확한 수를 평가하는 것은 어렵다. 그들 중 다수는 며칠 간의 자유를 얻은 후 돌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La Bourdonnais는 1735년에 그 숫자를 200명으로 추산했다. 그들은 종종 무장 단체로 살았고 도구, 무기, 여성 공급품을 얻기 위해 해안으로 내려오곤 했다. 일부 정착민들은 도망자들을 만나 그들에게 맞서려고 시도하다가 살해당했고, 이는 1732년 Brossard와 1737년 François Moy에게 닥친 운명이었다. 이러한 암살 이후 정착민들은 지역 대장의 명령에 따라 활동하는 무장 민병대를 조직했다. 일반적으로 프랑스 동인도 회사의 전직 장교였다. 그들은 도망자를 붙잡고 그들의 정착지를 파괴하기 위해 산으로의 습격을 조직했다. 이 과정은 성공한 것으로 보였으며 18세기 중반에는 탈출한 노예로 인한 위험이 훨씬 덜 심각해졌다.
노예들의 생활환경의 어려움은 과장되어서는 안된다. 부르봉 섬 노예의 기대 수명은 아메리카 섬에 있는 노예의 수명보다 길었고, 1765년에는 부르봉 섬 남자의 절반 이상이 40세를 넘었다. 18세기 전반에는 적어도 가족 생활이 일반적이었고 (생뽈 교구의 어린이 중 80% 이상이 적법한 아버지에게서 태어났다), 이는 안정의 요소였다. 그러나 경제적 쇠퇴의 결과로 18세기 후반에는 덜 일반적이게 되었다.
커피 작물의 발달과 농장의 성공으로 정착민의 수가 늘어났다. 1720년에서 1730년 사이에 정착민이 600~800명으로 약간 증가하여, 인구는 1740년에 2,000명, 1750년에 2,500명으로 증가했으며, 비슷한 속도로 계속 증가하여 1764년에 정착민이 4,000명에 이르렀다. 정착민의 40%는 관리직이나 군대에서 일하는 프랑스 동인도 회사의 고용인이거나 전직 직원이었다. 게다가 프랑스 본토의 지방들보다 부르봉 섬의 귀족 수가 더 많았다. 1776년 센서스에서 6,000명의 백인이 유럽의 700가구에 6,000명의 백인이 분포했고, 이들 중 35 가구가 귀족이나 기사 자격을 얻었는데, 이는 약 5%로 대도시 사회의 귀족보다 훨씬 높았습니다. 그들은 동인도 회사가 정기적으로 지급하는 급여(군주제와 유사한 서비스)에서 그 후 1766년부터 주권자가 부동산을 개발하는 동안 지급받는 수딩의 혜택을 받으려는 귀족 가문의 생도들이다.
La Bourdonnais 주지사는 재무부에 보낸 브리핑에서 “당신은 단지 사업을 하기 위해 인도에 오는 것이 아닙니다.” 라고 썼다. “자연스럽지 못한 반대의견은 표현될 수 없습니다.” 정착민들은 돈을 벌려고 왔다. 몇몇은 재능이 있었는데, 베누아 뒤마 (Benoît Dumas) 주지사의 경우도 그러했다. 1727년 그가 섬으로 파견되었을 때 총책임자들은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Dumas 씨는 자신의 개인적 생계를 위해 거주를 준비할 의사를 회사에 표명했으며, 회사는 아직 분할되지 않은 지역에서 , 고 Mr Boucher에게 주었던 것과 동일한 크기로, 그리고 다른 부민들의 경우와 동일한 조건과 가격으로 Bourbon 섬의 토지 분할을 제공하도록 명령한다.
또한 Dumas는 소유주가 포기하기로 결정했음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20,000 프렌치 파운드에 토지를 구입했으며, 1727년에서 1732년 사이에 그는 143명의 노예를 50,000 파운드에 구입하여 총 지출이 70,000 파운드에 달했다. 1735년에 폰디체리(Pondicherry)의 거버너로 임명되었을 때 그는 그 모든 것을 150,000 프랑스 파운드에 팔았다. 따라서 그는 8년이 채 안 되는 기간에 재산을 두 배로 늘렸다.[12]
1756년 이 섬의 공증인(notary)이 지적한 것처럼 당시 전망은 매우 긍정적이었다. “섬에 대한 투자는 (연간) 10% 이상을 생산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13]” 반면 프랑스 본토에서 이뤄지는 투자는 5%에 가깝다. 집을 소유한 부유한 크리올 여성(일반적으로 남편보다 10~15세 어린)과 결혼한 사람들을 제외하면, 정착민들이 빚을 지는 것이 가장 큰 어려움이었다.
분양(Concessions)은 무료로 주어졌지만, 규정에 따라 값비싼 노예를 구입하고 3년 이내에 농작물 재배를 시작하려면 약간의 자본이 필요했다. 예를 들어, 발라메 드 몽티니 (Balame de Montigny) 장교는 노예 20명을 구입하기로 계약한 빚을 갚지 못해 감옥에 갇혔다가 그곳에서 사망했다. 1747년에 Denis d'Acqueville 장교는 이전에 분양을 받고 29명의 노예를 구입하여 13,245 파운드의 자산에 대해 17,819.04 파운드의 부채를 남긴 채 섬에 2년 동안 머물다가 사망했다. 사무원이었던 Joseph Dacian은 섬에서 4년을 보낸 후 사망하여 9,821 파운드 재산과 자산의 56%에 해당하는 5,527 파운드의 부채를 남겼다. 같은 해에 사무원 François Mathieu는 23,332파운드의 자산과 15,878의 부채 (68%)를 가지고 거주한 지 10년 만에 사망했다. [14]. 1767년 프랑스 본토로 돌아온 후 총액 105,000 파운드에 국왕의 비서 자리를 샀던 섬의 전 사령관인 프랑수아 베르탱 (François Bertin)과 같은 성공 사례는 항상 있었다. 이곳에서 부유하게 된 것은 10,000~20,000 프렌치 파운드로 부르봉 섬에서는 높은 생활 수준을 누릴 수 있었지만 프랑스 본토에서는 아주 소박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정착민들의 재산은 18세기 동안 감소했다. 부르봉 섬에서 수입되는 커피 가격이 하락한 것도 주요 원인 중 하나다.
1723년 8월, 회사는 프랑스에서 커피를 판매할 수 있는 독점권을 부여 받았으며 “대상이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었기 때문에” 섬에서 생산된 작물을 무게 기준 파운드당 10 sols에 구매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 특권은 두 가지 이유로 도전을 받았다. 우선, 먼저 마르세유에서 하역된 Moka의 화물에 의해; 이론적으로 이 자유항은 관세 장벽으로 왕국의 나머지 지역과 분리되어 있지만 이는 그다지 효과적이지 않으며 밀수가 상당했다. 두 번째 장애물은 카리브해 지역의 커피 재배 발전이었다. 후자는 모카 나무들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보내지는 것을 막으려는 회사 이사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721년부터 이 지역에 적용되었다. 1729년 6월, 그들은 해양부 장관으로부터 카리브해의 부르사르들(bursars, 회계담당자들)에게 커피 재배를 금지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재배자들은 그들의 콩이 유럽의 나머지 지역들에서 매우 인기가 있었기에 금지령을 적용하지 않았다. 1732년에는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생산되어 프랑스를 경유하는 커피를 저장할 수 있는 허가가 주어졌다. 1736년에 그것을 수입할 수 있는 허가가 주어졌다. 결과적으로 프랑스에 도착하기까지 2,600 리그(거리의 단위. 약 3마일 또는 약 4,000미터에 해당)를 여행해야 했던 부르봉 커피는 단 1,200 리그를 여행하는 캐리비안 커피와 경쟁하게 되었다. 게다가 네덜란드인들은 그들의 식민지인 자바에서 커피를 재배하기 시작했고, 그 생산의 열매는 북유럽 시장에 넘쳐났다. 그 결과, 1730년에 회사는 부르봉 섬의 구매 가격을 파운드당 8 솔(sols), 1732년에 5솔, 1744년에 4솔, 1745년에 3솔로 인하했다. 그해에, 회사는 프랑스 본토에서 11솔~12솔에 산물들을 팔기로 했다 (운임 비용이 6솔에 달함).
섬 정착민들의 소득은 이러한 가격 하락으로 인해 영향을 받았다. 여기에 1732년 사이클론, 1747년과 1749년 진딧물(aphids) 등 자연재해로 커피나무가 피해를 입어 수확량이 감소했다.
또한, 파리의 관습에 따라 프랑스 식민지의 토지를 상속인 사이에 분할함으로써 토지가 분열되어 최대 수확량을 달성할 수 없었다. 하나 또는 두 개의 고랑으로 나누어진 긴 부지는 개발이 불가능한 복도가 되었다. 그 결과, '쁘띠 블랑'(소규모 백인 지주)이 많이 등장했다. 1735년에는 백인 57명 중 1명이 노예를 소유하지 않았거나 한두 명의 노예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이는 빈곤 속에 사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1779년에는 그 비율이 이런 상태에 사는 백인 10명 중 1명이었다.
회사가 정기적으로 주장했던 선박 및 승무원 보충을 위한 농업 생산의 발전으로 인해 빈곤층의 증가는 다소 둔화되었다. 1720년대와 1730년대에는 이러한 지침이 대부분 무시되었다. 1734년 섬에 잠시 머무는 동안 한 해군 장교가 언급한 바와 같이: “그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모두 커피 뿐입니다. 결과적으로, 배가 도착했을 때 대부분의 주민들은 커피 재배에만 집중하여 필요한 식량을 제공할 수 없고 점점 더 부족해졌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의 안녕을 소홀히 한 것 같습니다. ”
1735 년에 섬의 거버너로 임명된 La Bourdonnais는 이 과정을 뒤집기로 결정하고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회사가 선박에 식량과 물을 공급할 유일한 목적으로 섬에 정착했다는 것은 거의 한심한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주민들은 그의 지시를 따랐다. 그의 임기 말에 부르봉 섬은 밀 5,500 퀸탈, 쌀 9,000 퀸탈, 옥수수 40,000 퀸탈을 생산했다. 같은 기간 동안 섬의 통치 위원회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이 지속되는 동안 Ile de France (현재 Mauritius)는 곡물 지원을 위해 우리에게 상당히 의존했으며, 의심할 여지 없이 항구에 있는 선박에 필요한 많은 양을 공급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여기서는 밀과 옥수수를 찾을 수 없었어요…"
섬에 필요한 대부분의 물품은 이렇게 충당되었지만 쌀과 소금에 절인 쇠고기는 여전히 마다가스카르에서 수입해야 했다.
1764년 정부가 이 섬을 군주제의 직접적인 통치하에 두는 것을 고려했을 때 프랑스 동인도 회사의 이사들은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장담했다: “이 섬은 주주들에게 5천만 달러의 손실을 입혔고 정착민들은 전 재산을 회사에 빚지고 있습니다.”
회사가 주민들에게 노예를 구입하고 토지 경작을 시작할 수 있도록 재정적 지원을 제공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커피 형태로 상환된 이러한 대출금에 대한 이자는 자연스럽게 회사 비용에 포함되었다. 게다가 회사는 150명의 경비병과 경찰을 섬에 두었고, 행정관들에게 급여를 지급하기로 약속했다. 이러한 비용은 우선 회사 선박에 실린 노예 판매 수익과 프랑스 본토에서의 커피 판매로 쉽게 충당되었다.
또한 1723년 4월 23일자 법령에 따라 회사는 정착민에게 유럽(또는 아시아) 상품을 판매하여 송장 금액에 대해 100%, 그 다음에는 125%, 150%의 이익을 올리고 와인과 브랜디의 경우에도 이익은 200%, 300%였다. 이 소득은 배타적 시장의 원리를 적용한 것이며, 회사의 주요 수입원이었다. 여기에 커피 1 에이커당 4 온스의 세금(현물)과 양도권 (약 15,000 프렌치 파운드)이 추가되었다. 결과적으로, 초기 투자 이후 부루봉 섬 주민들이 비용을 부담하게 된다. 동아시아 항로를 따라 기항지를 유지해야 하는 회사의 의무를 고려한다면 이 섬은 이익을 얻었다고 볼 수도 있다.
동인도 회사의 부르봉 섬 개발은 물질적, 재정적 성공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다. 상업적, 재정적 균형이 달성되었지만 이는 정착민과 노예의 희생이었다. 한편, 모카로부터 도입되어 살아남은 한 그루 커피나무와 그 뒤로 들어온 몇 그루의 커피나무들이 전세계로 퍼져 Typica 커피 품종을 대체하는 존재가 된 것은 커피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건과 흐름임에 분명하다.
REFERENCES
- M. Charles Cunat. Saint-Malo illustré par ses marins : précédé d'une notice historique sur cette ville depuis sa fondation jusqu'à nos jours, Imprimerie de F. Péalat, 1857.
- Germain-Étienne Coubard d'Aulnay (1832),
『Monographie du café, ou Manuel de l'amateur de café : ouvrage contenant la description et la culture du cafier, l'histoire du café, ses caractères commerciaux, sa préparation et ses propriétés』 - Eugène Herpin.
Mahé de la Bourdonnais et la Compagnie des Indes.
Société des Amis du Musée, 2002. - Jean de La Roque.
A Voyage to Arabia Fœlix. E. Symon, London 1732. - Histoire abrégée de l'île Bourbon ou de la Réunion, depuis sa découverte jusqu'en 1880.
par un professeur d'histoire.
IMPRIMERIE DE GABRIEL & GASTON LAHUPPE 1883. - Albert Lougnon.
L'île Bourbon pendant la Régence, Desforges-Boucher, les débuts du café.
(Paris : Larose, 1956). - france TV. Moka Malo, des corsaires à la conquête du café (un documentaire animé)
다큐멘터리 각본 및 감독 Richard Hamon.
Link ⇒ https://www.francetvpro.fr/contenu-de-presse/24431 - Philippe HAUDRÈRE.
The East India Company and Bourbon island.
https://www.portail-esclavage-reunion.fr/en/documentaires/plantation-society/historical-context-2/historical-con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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