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음료는 모든 사람의 음료가 되었지만 항상 귀족적인 분위기 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분위기도 풍겼다. 그것을 사용하는 데에는 뭔가 의식적인 것이 있다. 향기로운 커피 콩의 자극 효과는 일반 식품이 만족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그 작물을 바람직한 것으로 만들었다.그것을 중심으로 전설이 발전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Fig. 1은 야생 커피나무들이 서식하는 지역이므로 커피가 유래했음이 틀림없는 하나 이상의 세계 지역들을 보여준다.
이집트와 초기 그리스, 로마의 고전 저술에는 커피에 대한 언급이 없다. 고대 세계에서나 수세기 후 그리스와 로마 또는 비잔티움에서 사용되었다는 증거가 전혀 없다는 것이 궁금하다. 기록에 따르면 트로이의 헬렌이 슬픔을 달래기 위해 이집트에서 가져온 忘忧药(nepenthe)는 아마도 와인을 섞은 커피였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작가들이 있었다.
종교적인 린네(Linnaeus, 1763)는 커피가 서기 900년경의 아랍어 경전에서 언급되었으며, 역사적으로 그보다 훨씬 더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믿었다. 그는 자신의 구약성서에 계산적이지만 평화를 사랑하는 나발 (Nabal)의 아내인 아름다운 아비가일 (Abigail)이 당시 떠오르는 다윗 왕 (King David)에게 볶은 커피 알갱이를 가져가서 양 진영 간의 평화를 협상했을 뿐 아니라, 나발이 죽자 매력에 끌인 다윗의 마음을 사로잡아 그녀를 그의 수많은 아내 중 첫 번째 아내로 삼았다는 이야기(I. Sam. XXV)가 있다고 믿었다.
린네 시대 이후로 구약성서의 다른 제자들은 창세기 첫 장에 커피에 대한 언급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거기에는 털이 많은 에서 (Esau)가 그의 장자권 (birthright)을 팔았던 유명한 붉은 죽(red pottage)이 언급되어 있다. 빨간색은 커피와 매우 오래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성경에서는 어떤 경우에는 포타주가 빨간색이었고, 다른 경우에서는 렌즈콩이라고 언급되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 이야기가 커피를 언급한다는 증거는 없으며, 그 가능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커피 역사에서 흥미로운 것 중 하나는 다소 전설적일 수도 있지만 예멘 (Yemen) 또는 야만 (Yaman)이라고 불리는 아라비아 지역에 커피가 도입되었다는 이야기이다. 페르시아 사산 왕조 (Sassanid dynasty of Persia) 후반기에 예멘 침공이 있었다는 사실이 기억될 것이다. 그것은 정복자들이 페르시아에서 육로로 나일강 계곡을 따라 여행하는 속도가 느려지면서 발생한 침략 중 하나였다. 군대는 그들이 획득한 영토에 오랫동안 머물렀고 그곳에서 멋진 고지대 국가인 에티오피아로 진출했다. 그래도, 그것은 홍해를 건너 아라비아까지 가는 다소 짧은 해상 여행이었다. 이 기간 동안 페르시아인들은 가장 관심 있는 것들을 가지고 갔다.
페르시아인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설형 문자(cuneiform)로 기록하기 전부터, 훌륭한 여행자이자 사치를 굉장히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자랑스러운 문명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 오래된 것이든 새로운 것이든, 흔하거나 이국적인 향수, 향신료, 각성제를 구석구석 찾아다녔다. 최초의 커피가 언제 예멘에 들어왔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대략 서기 575년경으로 다양하게 추정된다. 그것은 아마도 사산 왕조 정복자들의 문화-전달 침략 중 하나의 일부로 가져왔을 것이다. 따라서 처음에 원래 서식지 밖으로 커피를 처음으로 이동시킨 사람들은 모험가, 조로아스터 신도, 삶의 좋은 점을 숭배하는 사람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페르시아인들이 정복하기 오래 전에 커피를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은 아프리카 숲의 원주민이었다는 확실한 지식이 있다. 가장 완전하고 학술적인 역사 연구는 Ukers (1922)와 Chevalier (1929)의 연구였지만, Bradley (1716), Keable (n.d.), Abendroth (1825), Cramer (1957), Cheney (1925), 이와 관련하여 Porter (1833)도 검토되어야 한다.
일부 사람들은 이집트인과 친척이지만 수천 년 동안 그 혈통에서 분리된 일부였던 에티오피아인이 한때 아프리카에서 나와 좁은 홍해를 건너 아라비아 펠릭스 (Arabia Felix)에 이르렀다고 믿는다. 이곳은 아라비아에서 물이 더 좋은 지역으로, 혹독한 사막 초목의 단조로움을 덜어줄 만큼 녹색 정원이 있었다. 고대부터, Mohammed 보다 훨씬 이전에 Arabia Felix에는 나중에 메카 (Mecca)로 알려지게 된 성소가 있었다. 오랫동안 그곳에서는 종교와 평화의 예술을 전문으로 하는 별도의 문명이 번성했다. 선사시대 방랑 초기에 에티오피아 모험가들과 종교인들은 이 아름다운 곳의 외곽을 방문하여 정착한 것 같다. 이들 중 일부는 에티오피아에서 최초의 커피 씨앗을 그곳으로 가져온 것으로 믿어진다. 그곳에서 낙타 대열과 최초의 상선이 작은 봉지들의 커피콩을 페르시아로 가져갔고, 거기서부터 고대의 대상 경로(caravan routes)를 따라 북서쪽으로 갔을 가능성은 아주 없지는 않다.
인간이 소비하기 위한 최초의 커피콩은 거의 의심할 바 없이 씹어먹은 것이었다. 최초의 커피 사용과 관련된 전설의 예로는 잘 알려져 있지만 반복할 가치가 있는 셰이크 하지 오마르 (Sheikh Hadji Omar)의 이야기가 있다. 이 이슬람 탁발 수도승 데르비시 (dervish)였던 오마르는 횡령 때문에 메카(Mecca)에서 멀리 떨어진 모카(Mocha) 시의 아랍 지역에서 추방된 초기 이슬람 교도였다. 그는 끌려가서 경작지의 바깥으로 쫓겨났다. 그곳에서 그는 가든이 아닌 사막에 가까운 비참한 곳에서 혼자 살았으며, 맨손으로만 음식을 구해야 했다. 굶주림과 질병으로 거의 죽을 뻔한 그는 외딴 곳에서 자라고 있는 작은 커피나무를 발견했다. 그는 그 꽃봉오리와 열매를 씹으면서 자신의 불행이 완전히 해소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는 분명 좋은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였기 때문이다. 그러자 곧 병자들과 약한 자들이 사방에서 그에게 왔다. 그들은 그의 씨앗을 씹고 그의 커피 약을 마셨고, 몸과 영혼이 훨씬 나아져서 모카로 돌아왔다. 그의 명성은 퍼졌다. 그는 용서를 받았고, 광야의 고립에서 돌아왔고, 계속해서 커피 약을 조제했다. 감사하는 대중은 그에게 수도원을 세워주었고, 그곳에서 그가 살다가 죽었으며, 오랜 후에 그의 제자들이 그의 선행을 이어갔다.
또 다른 이야기인 아라비아 염소지기 칼디 (Kaldi)의 이야기에는 여러 가지 버전이 있다. 다시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가장 오래된 버전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칼디는 자신의 동물들이 특정 덤불의 과일과 가지 끝을 먹은 후 춤추고 신나게 뛰어다니는 것을 발견한 것 같다. 어느 날 그는 호기심이 생겨 과일을 시험해 보았고, 너무 상쾌하고 큰 자극을 받아 아라비아 언덕에서 염소들과 함께 춤을 췄다. 아래에는, 깜박이는 열기 속에서, 멀리, 메카라는 도시가 성장했던 오래되고 넓은 성소 공간이 잠들어 있었다. 여기에는 알라의 선지자가 존재하기 오래 전에 그곳에 왔던 나이든 종교적 방문자들과 탁발자들을 섬기기 위해 살았던 주민들이 거주하고 보호받았다. 마침 아래에서 졸고 있던 한 승려가 지나가다가 깨어 있는 목동을 존경하며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 일어났다. 칼디는 그에게 자신의 비밀을 말하고 그 수도사에게 과일을 먹어 보라고 했다. 승려는 그 열매와 씨앗 등을 모두 먹었고 활력을 되찾았고 졸음 없이 더 오랫동안 기도할 수 있었기 때문에 빨리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 이것은 곧 유행이 되었을 뿐 아니라, 메카의 가장 충실한 신도들에게 귀한 것이 되었으며, 신도들이 기도했던 다른 지역으로 퍼졌다.
또한 몇 세대 전에 이슬람 교도들은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비밀을 준 참 신자(True Believer)에게 커피의 미덕을 가르쳤고, 이름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에 대한 기억은 영원히 찬양 받을 것이라고 믿었다.
전해지는 또 다른 이야기는, 자세한 내용은 없지만, The Faithful이 두 명의 아라비아 승려인 Scialdi와 Ayduis를 특별한 숭배자(votaries)로 제안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처음으로 이슬람교도들에게 커피를 소개했기 때문이다. 15세기 아랍의 작가인 Schehabbedin Ben Abdalgiafar Almaleki는, 아프리카에서 Arabia Felix로 커피를 가져간 것으로 추정되며, 성직자이며 수피즘 머프티인 게말레딘 (Gemaladdin Abu Abdallah Muhamid Bensaid)이 커피를 처음으로 아프리카에서 Arabia Felix의 도시 다바르(Dhabar)로 가져온 사람이었다고 전하고 있다. 그들의 이름은 인류에게 큰 은인 중 하나로 오랫동안 소중히 여겨져 왔다.
[譯註] Dhabar라는 도시는, Dhamar (Zafar)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다마르는 예멘의 도시 Sanaa 남쪽 100km, Ibb의 북쪽, Al-Bayda'의 서쪽, 그리고 Aden의 북쪽에 위치한 해발 2,400-2,500m에 위치한 곳이다. AD 15-35년 Saba'와 Dhu-Raydan의 왕의 이름이었던 Dhamar Ali Yahbir II에서 유래된 도시명이다). Ukers의 설명에 따르면, Aden의 머프티(mufti)인 Sheik Gemaleddin이 Abyssinia 여행중에 커피 베리의 효능을 발견했고 Arabia Felix에서 커피 사용을 승인한 해는 AD 1454년 경이다.)
아랍 문명에서 커피가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오래된 참고자료가 많이 있다. 커피를 언급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코란의 구절도 있다. 영어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They shall be given to drink an excellent wine, sealed; its seal is that of the musk (그들은 봉인된 좋은 와인을 마시게 될 것이다. 그 봉인은 사향의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musk (사향)라는 용어는 아마도 음료나 와인을 담는 단단한 견과류를 가리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즉, 커피콩.
아라비아인들은 커피 열매의 과육을 짜낸 즙으로 알코올 음료를 만들었다는 보고가 있다. 그러나 코란에서는 어떤 알코올도 금지하고 있으며, 게다가 실험적인 커피 펄프 와인을 맛본 사람은 그 결과 매력이 없고 품질이 낮은 음료를 알고 있다. 반면, 씨앗에서 추출한 차는 자극제로서 매우 좋고, 무해하며, 만족스럽고, 매우 즐겨서 이슬람 문명의 중요한 특징이 되었으며, 지금도 남아 있다. 볶은 커피로 음료를 만드는 과정을 완벽하게 완성한 최초의 사람은 아랍인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아랍인들은 커피를 아주 좋아해서 영어권 세계에서는 종종 커피를 ‘아라비 와인(wine of Araby)’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이 작물과 관련하여 작물의 이름과 음료를 간략하게 생각해보는 것이 중요하다.
‘커피’라는 이름은 원래 아랍어에서 유래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오랫동안 아라비아에서 사용되었다.
아랍어 단어 'kahwa’는 아마도 먼 연관이 있었을 터인데, ‘impetuous(성급한, 충동적인)’을 의미하는 산스크리트語 ‘katu’ 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좀 더 동양적인 드라비다인들 (Dravidians)은 ‘kadu’라는 이름을 사용했고, ‘karwa’라는 이름은 힌두교식이다.
Coffea arabica에 대해 논의하면서 Linnaeus (1737, 1763)는 ‘arborbon’, ‘bunchos arabum’, ‘bun’, ‘bon’, ‘bunchum’, ‘bon vel ban’ 및 ‘buna’와 같은 일반적인 이름을 발표했다. 그의 일반 이름 Coffea는 아랍어 명칭인 ‘caova', ‘cova' 또는 ‘kahwah' 중 하나를 라틴어화한 것이다.
그 이전에 Chamberlayne (1682)은 넓은 터키 영토 전체에서 이 음료를 ‘coava’ 또는 ‘chaube’라고 불렀으며 이 음료는 ‘bon’ 또는 ‘bun’ 콩에서 유래했다고 밝혔다. 또 다른 초기 작가인 Bradley (1716)는 커피 열매를 ‘buna’라고 부르고 그 음료를 ‘caova’라고 보고했다. 그는 또한 그 나무가 ‘bon vel ban arbor’로 알려져 있었지만, ‘Aethiopians (에티오피아인들)’에 의해 단순히 '커피’라고 불렸다고 말했다. 그는 1598년에 출판된 Jacob Cotovicus의 ‘예루살렘 여행’을 인용했는데, 그 책에서 터키인과 아랍인이 커피 음료를 많이 사용하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그는 그 커피 음료를 'cahua'라고 불렀고, 다른 사람들은 ‘bunna’와 ‘bunchi’라는 단어를 사용했다고 했다.
Linnaeus보다 상당히 늦게 Abendroth (1825)의 커피에 관한 작품이 나왔다. 그는 아라비아에서는 커피 음료에 'kahwa', ‘kaw-wat', 'cavet', 'cohvet', 'cofe', 'cohue', 'cahue', 'cophe', 'chaube’, ‘chahave', 'cahovah’, 그리고 'chohava ''라는 이름을 붙였고, 커피 나무 ‘bon’이라고 했고, 그 열매는 ‘buna’라고 했다고 한다.
Linnaeus 이후 오랫동안, 인도의 시골 정원들에서는 커피가 ' boon bija'로 불리고 있었다 (Meppen, 1938). 이는 200여년 전 아비시니아(Abyssinia)에서 전해 내려온 고대 이름으로 그곳에서 알려졌는데, 그곳에서는 'boon'이라고 불렸다.
Chevalier (1929)에 따르면, 'bun'은 아랍어 이름이었지만, 암하라語 단어는 'bun’이고, 원주민 오로모 부족은 'buna'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요즘에는 아프리카에서는 ' buni', ' mbuni 음부니'라고도 부르곤 한다. 그리고 커피의 '콩'에 대해 말하자면, 그 이름은 'buni' 또는 'bun'이라는 단어에서 유래했을 것이다.
아프리카인들과 유럽인들이 커피에 여전히 사용되는 'buni'라는 단어와 그 변형 외에도, 고유한 명칭을 가진 많은 원주민 방언이 있다. 유럽인들은 이러한 사실을 거의 알지 못하지만, 이 작물이 아주 오래 전부터 토착적으로 사용되었음을 나타낸다.
Chevalier(1929)는 북동 아프리카, 주로 에티오피아에서 두 번 우려낸 커피 잎 우린 액(infusion)을 골라(Golla) 부족 사람들 사이에서 'tchambo'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잎을 으깨서 버터와 섞은 것을 ‘그레페(greffe)'라고 불렀고, 오메토(Ometo) 사람들은 식물 자체를 ‘두케(dukke)'라고 불렀다.
왕립 식물원 (Kew, 1915)의 보고에 따르면, 야생 커피나 재배 커피에 대한 나이지리아의 현지 이름은 'murian bambe'와 'muria ubambe’인데, 후자는 약간 다른 어감을 가질 수 있는 유사한 이름이다. 서해안 지역의 원주민은 특정 야생종을 사용하며 대부분 고유한 이름을 가지고 있으며 그 중 몇 가지 예가 Dalziel(1937)에 의해 제시된 바 있다. 야생에서 자라는 C. rupestris에는 고유어 'benim akpano'가 사용된다. C. stenophylla는 'yonembei'라는 이름을 사용하며, C. jasminoides는 ‘pegbie’와 ‘ma-gbel’로 부른다. 이것은 비밀 의식 중에 할례 상처에 바르는 약의 공급원으로 사용된다. 콩고에서 야생 C. lebruniana의 투룸부(Turumbu) 방언 이름은 ‘yabukula esendi’이다 (Germain & Kesler, 1955).
커피처럼 놀랍고 자극적인 특성을 지닌 식물이 특별한 용도로 많이 사용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실제로 극히 특이한 일이 될 것이다. 그것은 아라비아, 유럽, 미국의 초기 의학에서 많고 다양한 목적으로 알려졌다.
Chamberlayne (1682), Bradley (1716) 및 다른 사람들은 커피 추출액이 소위 고대 Jus Nigrum Spartanorum (스파르타인들의 검은 소스), 또는 Black Broth of Lacedemonians (스파르타인들의 검은 죽)이었을 수 있다고 제시했다. 이것은 신화의 시대를 다루고 있으며 물론 증명하기 어려울 것이다.
불과 250년 전만 해도 약용으로 사용된 커피는 소위 건조(시키는) 특성이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뇌를 편안하게 하고, 머리의 통증, 무기력증, 기침에 도움이 된다고 했다. 그것은 마비증 (paralytic)이나 '우울한 기운’이나 ‘뜨거운 뇌’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는 권장되지 않았지만, 폐결핵 (consumption), 기절 (swooning fits) 및 구루병 (rickets)에 대한 치료법으로 여겨졌었다.그러나 그것은 'fumes of wine'로 가득 찬 사람들을 정신 차리게 하는 데 유용했다(숙취 해소).
커피는 소화를 돕고 ‘혈액을 정화’하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식후 졸음을 예방하고 ‘소변과 월경 (catamenea)을 유발'하기 위해 투여하였다. 아라비아 여성들은 '정기방문'의 불편함을 완화(alleviation)시켜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 사용했다. 그 투여는 ‘Running Humours (체액 순환), Sores (상처), 그리고 King's-Evil (연주창, 림프절 결핵)’과 같은 분야에서 널리 퍼져 있었다. 또한 류머티즘(rheumatism), 통풍(gout), 간헐열에도 유용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어린이에게는 벌레 퇴치에 효과가 있다고 하며, 강력한 항수면제 (antihypnotic)였다.
그 초창기 이후로 커피는 보다 현대적인 약전에 들어섰고, 심지어 오늘날에도 블랙 커피 한 잔은 어떤 경우에는 의료 처방이 된다. 최근에는 정제된 카페인으로 처방되는 경우가 더 흔하지만, 가장 가치 있는 신경 자극제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음료와 같은 용도는 콩이나 콩에서 추출한 정제된 카페인이었다.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많은 저자들은 의료용으로 사용되기 이전에 최초의 커피 음료가 아마도 커피 잎을 주입한 것일 것이라는 학문적 증거를 제시했다. Barrett (1928)과 Burkill (1935)은 모두 차 같은 음료를 만들기 위해 커피 잎을 준비하는 일반적인 방법을 설명한다. 이 방법은 말라야(Malaya, 말레이 반도), 자바(Java), 수마트라(Sumatra)에서는 오래되었지만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어린 잎과 즙이 많은 줄기 껍질을 벗겨내고 약간 시들어 멍이 들게 한 후 잠시 방치한 다음 밝은 불 위에서 바구니에 말려준다. 작은 조각으로 나누어 차처럼 우려내면 맛있고 상쾌한 음료가 된다.
이 고대 음료는 잎으로 만든 것이며, 나중에 녹색 '체리'를 통째로 따서 보관할 수 있도록 건조시킨 후 담가서 더욱 자극적인 음료가 된 것으로 보인다. 수많은 작가, 특히 Bradley (1716), Southard (1918), Burkill (1935), Taunay (1935) 및 Sylvain (1955) 등은 건조된 커피 체리 펄프의 사용을 설명했다. 이 방법에서는 건조된 껍질이나 껍질을 차처럼 준비하여 맛있고 자극적인 음료를 만든다. 그것은 오래 전이었고 지금도 ‘quixr’, ‘qixr’, ‘kixr’, ‘kishr’ 그리고 이들의 변형이라고 불린다.
아주 최근에 Sylvain은 예멘에서 ‘kishr (키시르)’가 대중적으로 사용된다는 사실을 발견했으며, 흥미롭게도 그는 볼리비아에서 말린 커피 열매 껍질로 만든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만든 차 같은 음료의 사용도 접했다. 키시르는 다소 즐겁고 자극적인 음료였으며, 사람들은 kishr의 다양한 특성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고 그에 따라 비용을 지불했다는 것은 예멘에서의 그의 개인적인 경험이었다.
키시르 생산 후 남은 씨앗은 예멘에서 대략적으로 가공되고 건조되어 외부 시장으로 보내진다. 그곳에서는 볶은 커피가 거의 소비되지 않지만, 키시르는 인기가 있다. 키시르는 아라비아 반대편에 있는 아프리카 지역에서도 부분적으로 사용되며, Taunay (1935)는 소말릴란드에서 백인 외에 소말리아 흑인들도 키시르를 마신다고 보고했다.
아주 옛날부터 아프리카인들은 커피에서 나오는 식물성 산물들을 음식으로 사용해 왔다. 그들은 또한 Coffea 속에 속하는 다양한 숲과 정글의 나무, 관목(bushes, and shrubs)의 잎, 열매, 씨앗을 마시고 먹으면 흥분하게 하고(exhilarating) 좋은 효과가 있다는 것을 인식했다. 아마도 그들이 잘 익은 붉은 과일을 먼저 먹었을 것이라는 것이 논리적이다. 과육은 달콤하고 자극적인 카페인을 함유하고 있다. 이 것만으로도 상쾌했지만, 과일 시즌이 끝나고 과육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1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토착민들은 나뭇가지에 말린 과일이 매달려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따서 씹었다.
원주민들이 커피를 고체로 사용했다는 증거는 선사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슬람 이전 시대에 아프리카에서 아라비아로 소개되었으며, 현대 유럽과 미국에서 초콜릿 바가 소비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압축된 제품으로 섭취되었다. Keable (n.d.)에 따르면, 그러한 커피 바는 Caleb Negus의 유명한 십자군에서 그의 군대가 예멘의 Himyaritic 통치자 Yusif Yarush를 처벌하러 갔을 때 일종의 철 배급량으로 사용되었다. 그는 초기 기독교인들을 유난히 잔인하게 박해했다.
Abyssinians가 처음으로 그것을 고체 형태로 사용한 것은 이 무렵이었다. 낙타 기수들과 다른 사람들은 대상 여행에서 그것을 압착 케이크로 가져가서 대추야자와 함께 먹었다. 중앙아프리카의 원주민들은 커피를 전혀 마시지 않았다고 믿어졌다 (Thurber, 1884). 오히려 그것은 덩어리로 갈아서 동물성 지방과 섞은 다음, 당구공 크기 정도의 둥근 형태로 눌러 고체 형태로 먹었다. 사파리에서 그런 공은 한 사람의 하루 동안 영양분과 에너지를 공급하기에 충분했다. 이것들과 유사한 저작물은 아프리카 일부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상과 사냥꾼의 음식이다. 이는 외부 장애물이 가장 큰 긴 트레일에서 무거운 짐을 싣고 다니는 캐리어에 활력을 불어넣는 역할을 한다. 여전히 부피가 크고 신선한 음식보다 위험하고 약탈하는 동물을 쫓아내기 위한 화물과 무기가 더 중요한 곳이 있다. Chevalier (1929)는 탐험가 Speke가 일종의 수프에 사용되는 빅토리아 호수 지역에서 커피를 발견했다고 보고했다. 이러한 정글 용도의 정착된 모습은 아마도 먼 시대까지 확장되었을 것이며 얼마나 오랫동안 이런 방식으로 습관적으로 다루어졌는지 모른다.
Taunay (1935)는 긴 사파리 여행에 사용하기 위해 커피 베이스로 마련한 중요한 여행 음식을 갖고 있는 현대의 Galla 부족에 대해 이야기한다 (譯註: Galla族 또는 Oromo 族은 'free men'이라는 의미를 가진, 에티오피아의 최대 인종그룹이고, 케냐의 소수인종그룹이다). 그들은 커피를 볶아서 곱게 갈아 버터나 기타 식용유와 섞는다. 아몬드 크기와 모양 정도의 직사각형 공 모양으로 되어 있으며, 이를 농축된 에너지원으로 섭취한다. 커피는 선호하는 고형 식품으로 소비되었으며 소말리아 사람들은 가정에서 꼭 필요한 음식으로 간주했다. 그것은 마을에서 구워지고 곡물과 결합되어 마찬가지로 구워졌다. 오늘날 아프리카의 여러 지역에서는 좋은 품질의 부니가 씹는 데 사용되며 널리 인기가 있으며 현지 시장에서도 좋은 가격을 제공한다. 실제로 일부 아프리카 지역에서는 가공 및 탈곡 되지 않은 커피콩이 현지 판매용으로 나온다.
1956년 봄 대영 박물관은 현대 아프리카 수공예품을 전시했는데, 그 중에는 현재 원주민이 커피를 사용하는 방식을 암시하 는 작품도 있었다. 1939년과 1950년에 획득한 두 전시품은 우간다 Bukoba 지역의 힌다 부족(Hinda tribe)에게서 나온 것이다. 이것들에는, ‘추잉 검처럼 씹는 커피 콩들을 담기 위한 바구니들’이라고 붙혀있었다. 소말리랜드로부터 커피를 분쇄하는 현대의 목재 절구(mortar)가 나타났다. 1943년에 Lake Victoria 근처에 사는 Zifa 부족으로부터 획득된 예술적으로 어느 정도 완성된 멋진 목재 기물들이 포함되었다. 이들에는 ‘sweets처럼 씹는 커피 콩들을 담는 공주들이 만든 2개의 작은 바구니들'이라는 라벨이 붙었었다. 잘 만들어진 컵 플라스크가 Ankole 지역의 Ira 부족으로부터 확보되어, ‘sweets 처럼 씹는 커피 콩을 담는 역어 만든 글라스 보틀’라고 표시된 적이 있었다.
Uganda에 있는 동안 1952년 9월, 나는 마을 시장들에서 작은 다발의 조미된 부니를 본 적이 있다. 나는 알려준대로 그것들을 조금 먹어보았다. 일관되게, 처음에는 부싯돌처럼 보였지만, 입안에 넣으니 외부가 금방 부드러워졌고, 그것을 씹자 콩 2알이 부드러워져 씹을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이는 약간 시간이 걸렸지만 그 맛은 좋았고, 거의 짭짤했다(savoury). 자극을 받는 데는 이런 부니가 많이 필요하지 않았고, 적어도 나에 대한 효과를 볼 때 그러했다. 나중에 나에게 알려준, 큰 야생 C. canephora의 ‘King Tree’에서 온 것이었다; 그것들을 반 보다 더 익었을 때 녹색 열매를 따서, 단맛나는 풀들과 몇 가지 스파이스 허브들과 함께 담그어 둔다. 그 다음 오래 잘 보관하게 위해 오두막과 사람들의 집에서 매달아 둔다.
아프리카에서 부니를 먹은 장소들에 대한 어떠한 기록도 본 적은 없지만, 그들의 사용은 널리 퍼졌다. 나는 Angola에서의 소비를 알게 되었고, 부니는 아주 오랫동안 Gabon에서 식재료였다.
커피는 또한 교환의 수단으로도 기능했었다. 아프리카 원주민들 사이에서 코코아 콩들을 돈으로 채택했던 것은 잘 알려져있다. 아프리카 사람들이 커피도 그렇게 사용했던 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Bradley (1716)는 아라비아에서 커피가 돈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보고했다: ‘벼슬아치(Bashaw)에 의해 정해진 가치 또는 가격에 비례하여 베리들을 Asper (약 3파딩 정도의 가치가 있는 터키의 작은 동전, farthing = 구 페니의 ¼에 해당하던 영국의 옛 화폐)로 계산‘. 이 인물은 사업 조건에 따라 커피의 가격을 정했던 일종의 수출입 사령관이었다.
부니와, 씹어 먹기 위해 만든 커피로 만든 다른 고형물들은 아프리카인들만 사용한 것은 아니다. 오랫동안 종교적 측면들도 관련되어져 있다. 나는 이런 종교적 채택에 관한 어떠한 출판된 것도 읽어본 적이 없지만, 여러 번 그런 것들에 대해 들은 바 있다. 그들은 ‘blood brother’ 세리모니의 특별한 일부라고 들었다. 두 맹세 쌍방의 피를 섞어서 커피 열매의 쌍둥이 씨앗들 사이에 넣고 통째로 삼키며, 어떤 경우에는 미리 점토로 덮기도 한다; 또는 오래된 매장실에 놓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또는 씨앗을 핏방울과 함께 으깨서 의식에서 먹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커피 알갱이들은 또한 산파(midwives)와 불임 여성의 특정 주술과 다산 의식에 사용되었다고 한다.
옛 아라비아 학자들은 커피를 마셨지만 지난 천년 동안 거의 잃어버린 지식을 복사하고, 반복하고, 영속시키느라 너무 바빴기 때문에 커피를 의학적으로 묘사하고 그것을 그들의 성자들에게 주는 것 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당시의 전문적인 기도자들 사이에서 강장제로 메카와 같은 중심지에서 소비되었다.
이슬람교 신앙이 확립되고 확산되면서 커피는 모하메드의 무덤을 찾는 방문객들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쳤던 것 같다. 유럽의 옛 대륙에 대한 이슬람교의 대확장과 함께 커피는 신자들에게 자극제 역할을 했다. 처음에는 종교의례에만 사용되었고, 성자들은 이를 교회의 목적으로 제한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사용은 곧 널리 퍼져 자유사상가, 쾌락주의자, 좋은 것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중세 시대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대중에게 소개했다. 아랍인들은 13세기 말경에 실론 섬에 커피를 가져왔다. 르네상스가 시작되었고 유럽의 탐험은 새롭고 잘 알려지지 않은 곳으로 향했다.
아랍인들은 초기에 커피를 세속적인 용도로 사용하는 경우에도 일종의 숭배를 표하는 것이었다. 약 20년 전까지만 해도 남자들만이 커피를 준비하는 것이 허용되었으며 (Keable, n.d.), 이에 관한 다른 의식도 있었다. 특별한 팬에 구운 후 절구와 공이 또는 놋쇠 그라인더로 곱게 갈아준다. 정확한 양의 커피 가루를 정확한 양의 끓는 물에 넣었다. 이로 인해 끓는 것이 멈추고, 혼합물이 다시 끓기 시작하자마자 불에서 내려졌다. 약간 식으면 다시 넣고 끓어오르다가 멈출 때까지 이 과정을 세 번 반복했다. 그 결과 위에 살짝 거품이 올라 보기에 식욕을 돋우고 향이 풍부하고 맛이 풍부하며 자극이 강하고 쓴맛이 없는 완벽한 음료가 탄생했다. 특별히 준비된 컵에 부었다.
이 컵은 다른 컵과 함께 갓 만든 뜨거운 커피로 미리 헹구어져 한 컵에서 다른 컵으로 부었고, 헹궈진 커피는 마침내 커피 성자 셰이크 에쉬 샤드힐리(Sheikh esh Shadhilly)에게 바치는 헌주(libation)로 땅에 뿌려졌다. 컵은 커피를 받을 준비가 되면 절반만 채워졌다. 컵을 가득 채우거나 절반도 안되는 잔을 주는 것은 모욕이었다. 적에게 제공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두 잔 넘게 제공되지 않았다. 첫 번째 잔은 손님을 위한 잔, 두 번째 잔은 즐기기 위한 잔, 세 번째 잔은 칼을 위한 잔이라는 뜻이었다. 아랍 결혼식에도 커피 전통이 있었는데, 뭔가 서양에서 신랑신부에게 쌀을 던지는 게임처럼 말이다. 그들은 새로 만든 커피를 신부의 발 앞에 부어 커피 성자들의 마음을 달래고 신부의 은총에 영혼이 깃들도록 했다.
커피는 어떤 동방의 신부들의 결혼생활에서 높은 가치를 지녔으며 지금도 그렇다. 예를 들어, 과거 터키에서는 남자가 아내에게 '나는 당신과 이혼합니다'라고 세 번만 말하면 별거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외가 측이 스스로 이 일 자체를 장악하고 있었 고, 남편이 아내에게 커피를 거부하거나 커피를 잘 마시지 않으면 여성 측에서는 이혼의 정당한 사유가 되었다. 남자들도 결혼 예식과 잔치에서 목격한 것처럼 아내를 커피가 없게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엄숙한 서약을 했다.
이 마지막 단락에서 우리는 커피를 마시는 것에 대해 언급했다. 커피를 최초로 언제 마셨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전형적인 현대 터키 brew에는 고체와 액체 사이에 분명히 전환 단계가 있다. 이것은 아주 곱게 분쇄한 볶은 콩들에서 나온 것이며, 분말 형태의 고체를 끓는 물에 조심스럽게 주입한 후 다량의 설탕을 첨가하는 것이다. 분말 형태의 고체를 액체와 함께 마시게 되는데, 이것의 작은 컵은 다른 방법으로 만든 큰 컵의 커피보다 더 강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것이 어떻게 취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상당한 양의 글이 쓰여져 있으며, 그 중 일부는 매우 상상적이다. 그러나 오래된 관찰과 기록은 아라비아 학자들에 의해 보존되고 번역되었으며 Bradley (1716), Thurber (1884), Ukers (1922) 및 Keable (n.d.)과 같은 저작에서 참조할 수 있다.
Aden에서 처음으로 커피를 마신 것은 15세기 중반이었다. 그것은 곧 다른 대도시로 퍼졌고, 다음 세기에는 Grand Cairo에서 매우 인기가 많아 그 도시에는 약 천 개의 커피 하우스가 있었다. Alpinus는 1591년 그의 Plantis Aegypti에서, 터키, 이집트, 아라비아에서 마셨다고 보고했다. 또 다른 옛 작가인 코토비쿠스 (Cotovicus)는 1598년에 동양에서 커피를 마시는 것을 목격했다고 보고했다. 유럽에 진출하기 훨씬 전의 일이다. 비슷한 시기에 터키 제국을 여행하던 샌디스 (Sandys)라는 사람이 커피가 대중에게 팔리던 콘스탄티노플에서 커피를 발견했다. 그는 그것에 대해 비판적이었고, 터키인들이 하루 종일 앉아서 술을 마시며 시간을 보내면서 '작은 차이나 그릇에 담긴 뜨거운 음료를 마신다'고 설명했다. 그을음처럼 검고, 맛도 별반 다르지 않다.’
이 문제에 대한 수년간의 학문적 연구 끝에 Ukers는 커피의 초기 사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15세기 말 (1470-1500)에 커피는 Mecca와 Medina에 이르렀고, 그곳에서 Aden에서처럼 dervishes에 의해, 그리고 동일한 종교적 목적을 위해 커피가 도입되었다. 1510년경 이집트의 Grand Cairo에 도착했는데, 그곳에서 따로 거주하는 예멘의 dervishes는 종교적 헌신으로 보낼 밤에 커피를 마셨다.’ 그러던 중 커피의 미덕이 세속적인 사회 구성원들에게도 알려지게 되었고, Mecca, Medina, Aden, Cairo, and Constantinople에 바로 'kaveh kanes' 또는 'kahwahs'라고 불리는 최초의 커피하우스들이 생겨났다.
커피의 역사에서 우리가 합리적으로 확신할 수 있는 또 다른 최초의 연대는 서기 1600년이다. 필요한 순례 여행을 위해 Mecca로 갔던 바바 부단 (Baba Budan)이라는 성자에 대한, 확증을 위해 찾을 수 있는 문서 증거와 함께 상당히 잘 알려진 이야기가 있다. 그곳에서 그는 온갖 종류의 사람들을 만나고 교류를 했으며 온갖 것을 먹고 마셨다. 이 중에서 그는 'quahwah'에 가장 끌렸고, 그는 가까스로 언덕에 올라가 그 마법 같은 나무의 신선한 씨앗을 확보했다. 그는 ‘his seven seeds’을 자기 배에 묶은 채 최대한 빨리 인도 남부의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곳에서 그는 그가 살았던 Chikmagalur의 작은 도시 위 언덕에 있는 동굴 근처에 보물들을 심었다. 그 특별한 씨앗은 발아하여 나무로 자랐고, 이 식재들로부터 그 나무는 더 멀리 퍼져 Mysore, the Coorg, Goa, Coimbatore 위의 높은 개트(gats, 수로??), 중앙 지방의 Berar까지 북쪽으로, 그리고 Travancore와 인도 최남단 투티코린(Tuticorin) 서쪽 구릉 지역까지 내려갔다.
이미 1503년에 네덜란드인들이 실론으로 첫 커피나무들을 가져갔다. 1616년에 살아있는 나무 한 그루가 예멘 해안의 고대 항구인 모카 (Mocha or Mokka)에서 네덜란드로 운송되었다. 이것은 승인되지 않은 최초의 나무 이전이었다. 1616년에 Mokha 항구를 방문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상인 Pieter van den Broecke가 항구에서 트럼펫 연주자 한 명과 군인 두 명과 함께 부여받지 못한 지역 Paşa로부터 거래 허가를 얻기 위해 북쪽 Sana'a로 여행했다. 그러나 그는 뿌리째 뽑힌 커피나무 전체를 암스테르담에 있는 식물원으로 밀수입하는 데 성공했다.
한편, 커피콩은 아라비아에서 신흥 유럽으로 수입되는 이국적인 품목이 되었다. 비즈니스 마인드가 강하고 모험적인 네덜란드인들은 실론에서 포르투갈의 지배자들을 정복한 후, 유럽의 커피하우스 무역을 위한 커피에서 미래를 보았다. 곧바로 그들은 실론에 흩어져 있는 식물을 번식시키기 시작했고, 1658년경에는 그것들을 재배적 패턴으로 가져와 1690년까지 잘 자라고 있었다. 커피는 실론과 인도의 유럽인에 의해 이익을 위해 재배되었으며, 이로 인해 아라비아 항구의 커피에 대한 유럽의 의존도가 깨지기 시작했고 음료의 사용도 확대되기 시작했다.
한편 Levant 지역에서는 커피하우스가 문명의 가장 중요한 부속물이 되었다. 이집트 그랜드 카이로에 커피 하우스가 처음으로 알려진 날짜는 1500년이지만 그 이전에는 아라비아에서 흔하고 오래되었다. Constantinople에서는 1554년에 최초의 커피 하우스가 문을 열었지만, 이 음료는 대중에게 판매되기 전에 수세기 동안 모든 중요한 근동 도시들에서 사용되었다. 음료는 항상 강하고 검은 색이었고 종종 향신료가 첨가되었다. 이 kaveh kanes에 앉는 것은 대도시에 있다는 표시였다.
상인이나 낙타 운전의 달인은 고대 도시의 그랜드 바자르 사이를 오가는 긴 야생 캐러밴 여행을 하면서 허브 차와 차를 마셔야 했는데, 그 외에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문명의 문 앞에 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고마운 커피 향기를 맡을 수 있는 문에 도착했을 때였다.
커피 하우스는 결국 그리스와 이탈리아에 전해졌다. 커피가 언제 페르시아나 시리아에서 일반 상업 품목이 되었는지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16세기 어느 날, 이들 국가 모두에서 동양형 커피 하우스가 즉시 성공을 거두었다. 낮은 의자, 고급스러운 쿠션, 멋지게 만든 화로, 조각된 장식품들, 고급 카펫, 두꺼운 양탄자, 두들겨 만든 금속 제품 등 그 나라의 풍부한 예술성으로 가구가 갖춰져 있었다. 동부 지중해의 일부 국가에는 여전히 그러한 특징적인 시설이 있다.
그런 커피 하우스 중 일부는 매우 매력적인 기관이었다. 많은 것들이 정교하게 디자인되고, 조명이 켜져 있고, 장식되었다. 어떤 곳에서는 서비스가 섬세하고 정교했지만, 다른 곳에서는 더 실용적이었다. 일부는 훌륭한 가수와 댄서, 선언문을 가져와 고객을 즐겁게 하고 기쁘게 했다. 커피잔이 찰칵거리는 소리를 억제하면서 고전을 큰 소리로 읽었으며, 그러한 집에서는 순전히 남성적인 웃음을 위해 음란한 오락과 이야기를 전하기도 했다. 이것들은 인간 세계의 일부였다. 그들 중 일부는 오로지 논쟁의 즐거움만을 위해 모인 성장한 그룹이 있었고, 일부는 웃음이 거의 끊이지 않았으며, 다른 일부는 깊은 생각과 위대한 철학이 있었다. 한때 종교적 보조물이었던 음료가 육체적 쾌락을 위한 것이 되었고, 일부 사람들은 커피하우스가 기존 질서에 반하는 위험한 추론의 원천이라고 생각했다. 이슬람교 교회와 국가는 그들의 불안한 영향력을 인식했다. 술탄과 다른 지도자들은 한 번 이상 커피하우스를 폐쇄했지만, 불확실성과 편견을 무시하고 통치자의 기본적인 선의로 인해 항상 다시 문을 열었다.
15세기 후반에 이 음료는 왕족과 귀족들이 매우 탐내는 사치품이 되었고, 그 맛은 부유한 사람들과 심지어 신분이 낮은 사람들에게도 퍼졌다. 그 금전적 가치가 엄청나게 증가했다. 커피가 더 시원한 곳에서 번성했던 열대 지방에서 커피를 가져와, 남부 유럽의 온화한 농업 지역에서 생산하려는 시도는 불가피했다. 예를 들어, 프랑스에서는 Dijon 들판에서 재배하려고 시도했지만 서리를 견딜 수 없었다. 오늘날까지 유럽에서 재배되는 커피는 전적으로 온실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실용적인 네덜란드인들은 Ceylon에서의 우수한 생산과 발전, 그리고 그것이 가져온 부를 보고 식민지 개척자들을 더 멀리 열대 지방으로 보냈다. 다른 사람들도 그들의 모범을 따랐다. 많은 나라들이 먼 땅에서 금과 기타 부를 가져오기 위해 전사들을 파견한 반면, 네덜란드 사람들은 먼 열대 섬에 농장주가 되어 그곳에서 차와 향신료와 커피를 유럽으로 운송했다. 그들은 인도의 말라바르 (Malabar) 해안에서 자바 (Java)로 옮겨진 최초의 커피 나무를 얻은 사람들이었다. 이 작업은 1696년에 처음 이루어졌으나 홍수와 지진으로 인해 식물이 파괴되었다. 3년 후 네덜란드인들이 이 작업을 반복했고 이번에는 몇 그루의 덤불이 살아났다. 이 동일한 말라바르 커피는 거의 100년 전에 Baba Budan이 Mecca에서 인도의 치크마갈루르 (Chikumagalur)로 가져온 ‘seven seeds’에서 직접 유래되었다. 이 나무들이 이스턴 커피와 급성장하는 네덜란드 동인도 제도 커피의 조상이라고 한다.
Java에서 Chikumagalur 커피가 정립된 직후, 식물의 과학적 측면에 많은 관심이 일깨워졌고, 유력자, 식물학자 사이에서 강한 열망이 있었고 커피가 자라는 것을 보고 싶어했다. 씨앗은 Java의 바타비아 (Batavia)에서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 (Amsterdam)으로 보내졌지만 긴 바다 항해 중에 반복적으로 죽었다. 1706년에 Yemen에서 확보한 종자로부터 자라는 아주 소수의 나무들이 네덜란드 선박에 실려 암스테르담으로 옮겨져 암스테르담 Amsterdam Botanical Gardens의 온실(glasshouse)에서 성공적으로 자랐다. 암스테르담에서 자란 이 나무의 씨앗은 이후 유럽 여러 나라의 온실(conservatories)로 보내졌다.
세계의 이 지역은 큰 혼란에 빠졌고 분쟁을 종식시키고 경계를 정하고 영향력을 균등화하기 위해, 국가 대표자들이 여러 차례 회의를 열었다. 이는 1713년과 1714년에 국가 대표였던 많은 서명자들이 참석한 네덜란드의 유명한 위트레흐트 조약(Treaty of Utrecht)으로 정점에 달했다. 여기에는 커피가 한 몫을 했다. 살아있는 나무 표본이 매우 만족스러운 왕실 선물로 여겨졌다는 것은 커피에 부여된 보기 드문 호의와 외적, 내적 가치를 나타낸다.
네덜란드는 유럽의 가장 위대한 왕인 프랑스의 루이 14세(Louis XIV)에 대한 깊은 존경심으로 인해, 1712년에 평화를 가져오는 데 도움을 준 데 대한 감사의 표시로 그에게 커피 나무를 주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다음 해에 그들은 다시 시도했고 이번에는 나무가 살아났다. 그것은 높이가 5피트이고 멋진 용기에서 자라는 건강한 표본이었다. 그것은 이 작물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나무임이 밝혀졌다. 그러나 루이 14세가 어떻게 커피 나무를 구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다른 이야기도 있지만 결과는 동일하다.
이 나무는 Mocha 항구에서 바타비아 (Batavia)를 거쳐 몇 달 동안 머물다가 Amsterdam으로 직접 배송되어 처음 몇 그루의 자손을 생산한 살아 있는 어미나무에서 나온 묘목이다. 이들 중 가장 좋은 것은 암스테르담 온실에서 재배되었으며, 그곳의 시장인 Nicolas Witsen은 특별한 수행원과 함께 그것을 현대 유럽의 가장 위대한 독재자이자 강력한 주권자에게 보냈 다. 루이 14세는 그것을 받아들였고 즉시 흥미를 느꼈다. 왜냐하면 그는 좋은 커피를 맛보는 사람이었고 가족과 신하들을 위해 매년 많은 돈을 커피에 지출했기 때문이다. 그의 습관적인 지능과 그를 특징짓는 그의 백성에 대한 기민한 배려로, 그는 하루 동안 그 나무를 눈 여겨 본 후에, 그 나무를 젊은 교수인 Antoine de Jussieu의 손에 맡겼다. Antoine de Jussieu는 새롭지만 잘 훈련되고 유능한 파리의 Jardin des Plantes 큐레이터였다. 황제는 즉시 그 나무를 연구하여 1년 안에 회고록으로 정리하고, 이 왕실 선물이 잘 자라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일 것을 명령했다. 이 나무는 열대 아라비아에서 온 것으로 추정되었으며 프랑스에서 최초로 지어진 온실이 이 나무를 위해 신속하게 건설되었다. 그러한 관심은 그것이 매우 중요한 것으로만 해석될 수 있을 정도로 일치했다. Linnaeus가 이 속과 아라비카 종을 명명한 것은 Jussieu의 작업에 대한 연구와 유럽 온실, 정원 및 식물 표본관(herbaria)에 있는 이 나무의 건조 표본과 살아있는 직계 후손을 조사한 결과였다.
이 가장 주목할만한 커피나무가 예멘의 나무 씨앗에서 유래했다는 점을 다시 한 번 지적할 가치가 있을 것 같다. 그것은 아마도 몇 년 전에 Chikumagalur 언덕에 있는 자신의 동굴로 돌아가 살았던 늙은 성자 Baba Budan이 인도로 가져온 것과 같은 계통의 직계 후손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파리의 황실 온실에서 잘 자랐고, 그 씨앗과 묘목은 프랑스 제국의 구석구석으로 보내졌다. 그 귀한 나무가 파리에서 처음으로 도입된 것은 1715년이었다. 이때 이 나무는 카리브해의 프랑스령 안틸레스 제도(French Antilles)로 보내졌다. 같은 해에 지구 반대편에 있는 부르봉(Bourbon) 섬도 이를 받았다.
많은 문헌 (예: Ukers, 1922; Cheney, 1925; Chevalier, 1929; Cramer, 1957; Sprecher von Bernegg, 1934; Bradley, 1716; Linnaeus, 1763; 등)을 검색하면, 이 동일한 나무가 현재 자라고 있는 수십억 그루의 커피나무의 조상임을 보여준다. 그 자손들은 Bourbon (or Reunion), 인도차이나, 앤틸리스 제도, 아프리카 대륙과 같은 옛 프랑스 식민지에서 처음으로 재배되었다.
그 중에는 루이 14세의 칙령을 인정하여 심은 것도 있고, 식민지 개발자들의 인정하여 나온 것도 있다. 다른 사람들은 인도 일부 지역, 캘커타(Calcutta) 근처의 더우글리 (d'Ougly)로, 코로만델 해안(Coromandel Coast)의 폰디체리 (Pondicherry) 지역으로 보내졌다. 1799년까지 커피는 인근 프랑스 소유인 Talicherry에서 발견되었으며, 인도의 일부 영국 지역에서 재배되고 있었다. 그러한 중심지에서 식민지 주민과 선교사에 의해 서인도 제도(West Indian islands) 전역, 그곳에서 멕시코, 중앙 아메리카, 남아메리카, 영국령 동아프리카, 중앙 아프리카, 남아프리카 및 기타 여러 지역으로 심지어 호주와 중국 남동부로 전파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기간 동안 커피는 의학자들과 식물학자들에 의해 연구되었고, 드 쥐시외(de Jussieu)는 1717년경 커피에 Jasminum Arabicum이라는 학명을 부여했다. 그러나 Linnaeus가 이 식물을 연구하게 되었을 때 그는 이 식물이 Jasmines에 포함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후 그는 Coffea 속을 세웠고, 1737년 그의 유명한 저서 『Genera Plantarum』에서 이에 대한 설명을 발표했다. 그가 획기적인 『Genera Plantarum』을 출판한 것은 몇 년 후(Linnaeus, 1753)였으며, 그곳에서 그는 원래 아라비아에서 유래했다고 믿었던 Coffea arabica 전체 종을 설명했다. 그의 단순하고 명료하며 틀림없는 라틴어 설명과 그가 수세기 전에 제시한 특징은 여전히 유효하다.
바로 앞의 스케치를 제외하고도 Coffea arabica L.의 확산 이야기 중 일부 세부 사항은 주목할 만하며 함께 모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이야기 중 일부는 로맨스일 수도 있지만 개요는 정확하며 그 작물에 대한 거의 숭배에 가까운 아이디어를 제공한다.
이야기 중 하나는 파리(Paris)에서 마르티니크 섬 (Island of Martinique)으로 묘목을 가져온 프랑스인 가브리엘 마티외 드 클리외 (Gabriel Mathieu de Clieu)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곳에서 50년 후 1,900만 그루의 후손이 자랐다고 한다 (34페이지 참조).
1718년 네덜란드인들은 루이 14세의 나무에서 나온 것과 동일한 원산지에서 나온 커피를 수리남 (Surinam)의 수도인 파라마리보 (Paramaribo)에 도입했다.그 곳에서 그것은 번식하고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재배되었으며 지속적으로 보호를 받았지만 결코 좋은 성과를 내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덜란드인들은 씨앗을 나눠주지 않았다. 무르구르 (Mourgure)라는 사람이 프랑스령 기아나(French Guiana)에서 수리남으로 탈출하여 심각한 법 위반을 원했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던 것 같다. 그는 기아나의 프랑스 당국과 비밀 조약을 맺고 자유의 대가로 잘 보호된 네덜란드 정원에서 커피를 가져오기로 계약했다. 그는 경비병을 연구하고 은신을 통해 원하는 것을 훔쳤고 씨앗을 가져가 1722년에 송환되었다. 이것이 알려졌고 커피의 가치가 높아짐에 따라 수리남에서 브라질로 커피를 가져가려는 다소 유사한 시도가 곧 이루어졌지만 도난이 발견되었고 그 씨앗은 네덜란드 수준에 들어오지 않았다. 브라질의 모험가들은 그러한 시도를 여러 번 실패했다. 마침내 성공적인 도입은 프란시스코 말로 팔헤타 (Francisco de Melho Palheta)라는 브라질 황제의 로맨스 사절에 의해 시작되었다.
한편, 영국의 식물학자 제임스 더글러스(James Douglas)는 고귀한 나무인 de Jussieu의 Jasminum Arabicum에 대해 더 많은 정보를 수집했다. 더글라스는 당시로서는 훌륭한 논문을 썼다. 그의 동포들 (compatriots)은 1730년에 이 나무를 Jamaica에 도입했다. 10년 후 Java에서 훈련을 받고 있던 일부 스페인 선교사들이 커피 종자를 그곳에서 필리핀 (Philippines)으로 가져와 그곳에서 작물을 재배했다. 1748년에는 산토도밍고(Santo Domingo)(지금의 아이티 Haiti) 지역에서 쿠바(Cuba)에 도달했는데, 그곳은 수년 전에 루이 14세의 칙령에 의해 도입되었다. 이 기간 동안 네덜란드인들은 열심히 커피를 재배하고 유럽으로 수출했다. 1750년까지 네덜란드인들은 살아있는 식물을 Java에서 마카사르 해협(Macassar Straits)을 거쳐 발리(Bali)로 수입하여 셀레베스 (Celebes)에 정착시켰다. 이 모든 도입들은 수십억 그루의 나무들로 확장되었으며, 발견된 곳마다 모두 동일한 고귀한 혈통에서 나왔다. 모든 것은 루이 14세가 1713년 어느 날 그의 궁정에서 받아들인 왕의 나무 자체의 원래 줄기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었다. 연구에 따르면 이 계통의 Coffea arabica가 열대 지역에서 가장 빠르고 광범위하게 퍼진 때는 주로 1714년에서 1800년 사이였다.
네덜란드인, 포르투갈인, 스페인인, 프랑스인, 그리고 영국인들이 이동하고 손을 뻗어 전 세계에 걸쳐 대부분의 영토 발견과 정복을 하고 있었다. 제국들이 닿거나 가까운 곳에서 약간의 생산을 통해 전략적 소유물에 대한 비용을 지불할 수 있다면(종종 커피와 같은 열대 제품인 경우) 자부심을 가질 추가적인 이유가 있었고, 그 판매로 주둔군(garrisons)과 해군에 지불할 돈이 있었다. 커피가 여러 곳에서 재배되기를 원하기 시작했다. 커피는 널리 구입되었다. 국적에 상관없이 먼저 자리를 잡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값싼 노동력을 착취할 수 있던 시대였다. 이 노동자들은 백인 '하청계약자(indentures)'이든, 아프리카, 멜라네시아인, 태평양 섬 주민, 황인종, 아메리카 원주민 등 교육을 받지 못한 민족을 포함하여, 다른 완곡한 표현으로 불리는 하찮은 농민이든 참을성 있는, 다소간의 노예 기반이었다. 커피 생산은 그들이 알고 있는 농업 기술과 이를 수행할 수 있는 충분한 인력을 바탕으로 상당히 쉬웠다. PL 5는 에티오피아와 예멘에서 현대 커피가 재배되는 장면을 보여준다.
나무의 주위를 움직이는 것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가장 좋아하는 음료가 만들어지게 되는, 생산된 콩의 사용 과정에 대한 관심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커피 한 잔이 유럽에서 인기를 끌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 초창기였다. 낭만도 있고, 동양의 마법 같은 느낌도 있고, 나름의 멋진 맛과 좋은 자극도 있었다. 커피숍이나 카페가 엄청나게 인기를 끌었다. 그곳은 경이로움과 오락, 훌륭한 정신적 휴식의 장소였다.
커피는 1615년 근동의 상인들에 의해 베니스로 들어왔다. 수십 년 동안 그 도시 공국에는 커피숍이 많이 생겼다. 1711년, Java에서 상업용으로 생산된 최초의 소규모 커피 화물이 유럽 무역을 위해 네덜란드로 배송되었다. 이 제품은 그 이전에도 인기가 높았으며, 찰스 2세 시대에 영국에서 특히 높이 평가되고 인기를 얻었다.
영국 최초의 커피 하우스는 1650년 레바논인에 의해 옥스퍼드에 문을 열었다. 다른 곳들도 곧 생겨났고, 그것들이 학문의 중심지 근처에서 번성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특히 주목할 만한 곳은 All Soul's College 근처의 Tillyard's였다. 왕정복고시대 (the Restoration, 찰스2세가 왕위를 되찾은 1660년 이후 기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그룹을 매일 모았다. 그들은 옥스퍼드 클럽(Oxford Club)으로 알려졌고 나중에 왕립학회(Royal Society)가 된 조직의 시작이 되었다. 처음에는 이러한 대상점 중 어느 것도 런던에 없었지만 아이디어는 곧 그 큰 도시에 도달했다.
런던 커피 하우스의 최초 기록에 대해서는 몇 가지 논쟁이 있었다. 액상 커피 (Cheney, 1925 참조)는 이미 1651년에 Sultan's Head로 알려진 런던의 'cophe house'에서 제공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Bradley(1716)는 터키 상인 Mr. Daniel Edwards와 그의 하인 Pasqua Rosee가 1657년 Cornhill의 St. Michael's Alley에 있는 그의 집에서 런던에서 처음으로 마신 커피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어쨌든 이 음료는 곧 큰 인기를 끌게 되었고, 커피 하우스에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그 주변에 대규모 수입 사업체들이 세워졌으며, 그 중 많은 곳이 명성을 얻을 이유가 있었다. 예를 들어, 1688년에 Mr. Edward Lloyd는 Royal Exchange 건물에 커피 하우스를 시작하여, 고객을 위해 선박 이동 및 기타 수많은 상업 문제를 추적했다. 이 하우스는 좋은 커피와 정보의 신뢰성으로 유명해졌고, 현재 거의 모든 곳에서 운영되고 있는 런던의 Lloyds로 세계 최대의 보험 기관으로 성장했다.
영국의 커피하우스는 특정 지식인(intelligentsia)과 사교 집단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 하우스들에서는 너무 많은 논쟁과 토론이 있었고, 스파이들은 그 장소의 선동적인 성격에 대한 암울한 이야기를 가지고 찰스 왕에게 돌아왔다. 그는 조언을 받고 폐쇄하려고 시도했다. 그러한 취지의 왕령이 내려졌으나, 변호사들이 그것이 인간의 기본권을 억제한다고 지적했기 때문에 11일 만에 그 명령은 철회되었다. 그런 다음 왕은 공개적으로 판매되는 그 음료에 대해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여 다른 유사한 정부의 금지 조치와 비슷한 상황을 초래하였는데, 세금 부담을 줄이고 여전히 하우스들에 커피를 허용하도록 하는 엄청난 기발한 독창성을 쏟아부었다.
그러한 억지(deterrents)는 커피의 인기가 높아지거나 더 많은 커피 하우스가 설립되는 것을 막지 못했다. 이 기간 동안 런던에는 약 3000개소가 있었고, 물론 영국의 다른 대도시에도 그 수가 매우 많았다. 영국에서 커피 하우스가 최고 수준의 세련미와 인기를 얻은 것은 17~18세기였다. 이 황금기 동안 중요한 것들의 이름은 Man's, Rota, The Grecian, Old Man's, Lion's Head, The Cocoa-Tree, The Folly, Turk's Head, Will's, Child's 및 St. James였다. 매우 잘 알려진 이름은 Tom's이고 또 다른 이름은 The Rainbow였지만, 아마도 가장 유명한 이름은 The Cheshire Cheese였다.
여기에는 잡담, 철학, 우아한 시와 드라마, 예술 비평, 법률 선언, 독설, 정치적 논평, 온갖 색깔의 이야기 또는 가장 사려 깊은 에세이 등의 공명판(sounding boards)을 만든 당시의 배회하고 격렬한 천재들이 수용되어 있었다. 이러한 오래된 단골손님들 중 일부의 이름은 Dryden, Pope, Pepys, Addison, Harris, Ben Johnson, Sir William Petty, Milton, Macaulay, Steele, Samuel Johnson, David Garrick, Boswell, Oliver Goldsmith, Gibbon, and Adam Smith와 같은 훌륭한 영어 사용자 목록에 포함되었다. 정말 좋은 날들이었다. 영국 예술과 문학이 꽃피웠고, 영국 윤리가 발전했으며, 왕정복고(the Restoration)가 이루어졌고, 영연방의 성숙한 이념이 탄생했으며, 변덕스러운 의회 회의가 더욱 정기적이고 유익해졌다. 이 모든 일에 커피하우스가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쳤는지 누가 가늠할 수 있겠는가?
이 세기 동안 다른 나라의 커피숍도 지적인 모임의 중심지였다. 이 음료는 1657년 초 파리 가정에서 미미한 양으로 판매되었으며, 1664년 콘스탄티노플 시장에서 그 도시로 처음으로 소량 배송되었다. 1669년, 위대한 루이 14세의 궁정 주재 터키 대사인 솔레만 아가 (Suleman Aga)는 그곳의 귀족과 왕족들에게 화려함과 의례, 사치가 깃든 커피를 소개했고, 왕은 곧 열렬한 신봉자가 되었다. 유럽 전역의 귀족들에게 특별한 총애의 표식으로 주어져 큰 화제를 모았다.
프랑스 커피 하우스가 최초로 설립된 시기는 1671년으로, 당시 마르세유 (Marseilles) 항구에 한두 곳이 설립되었다. 곧 더 많은 곳들이 설립되었다. 선원들과 선장들, 그리고 그들의 소녀들과 상류층이 그들 안에 모였다. 진한 블랙 커피 한 잔은 곧 프랑스의 본고장에서 자리 잡게 되었고, 몇 년 후 파리에는 더 많은 커피 하우스가 생겨났다. 그곳에서 그들은 급속도로 늘어나 밀폐된 정원, 보도, 지붕 아래 방, 값싸고 어두운 움푹 들어간 곳, 가장 비싸고 조명이 밝은 장소를 차지했다. 그들은 어디에나 있는 것 같았다. 이들은 대부분 '카페'라고 불렸는데, 이 이름은 계속 남아 있으며 나중에 그곳과 다른 많은 국가에서 발견되는 레스토랑과 식사 장소를 가리키는 것으로 되었다.
최초의 프랑스 커피 하우스의 수는 거친 의자와 곳 무너질 듯한 테이블이 모여 있는 도시의 의심스러운 지역에 불과했다. 그곳은 주로 하류층을 위한 곳이지, 고급 패션을 즐기는 사람들을 위한 곳은 아니었다. 곧 좀 더 우아하게 꾸며진 집들이 몇 채 생겼고, 그들은 즉시 인기를 얻었다. 1690년까지 파리에는 300개가 넘는 카페가 있었고 150년 동안 그 수는 3,000개로 늘어났다. 작가들은 한때 옛 파리는 결코 잠들지 않는 하나의 거대하고 연속적인 커피 하우스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고 말했다. 전 세계 각계각층의 남성과 여성이 모여 파리 카페의 시끄러운 대화를 즐기고 들었다. 아마도 유럽이나 아메리카 대륙 전체에서 가장 유명한 커피하우스는 아마도 파리에 있었으며 지금도 거기에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이곳은 13 rue de FAncienne Comedie에 있는 Procope이다.
프로코프는 한때 프랑스의 몽상가, 사상가, 행동가들 사이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였다. 영업시간 동안 그들은 테이블 주위에 청중을 모았다. 이름은 많지만 그 중에는 Voltaire, Rousseau, Beaumarchais, Hugo, Zola, Marat, Robespierre, Danton, Balzac, Desmoulins, Napoleon Bonaparte, Paul Verlaine, Bernhardt, Clemenceau 등이 있다. 파리 커피 하우스는 프랑스 혁명 기간 동안 가장 뜨거운 논쟁과 들끓는 흥분의 장이 되었다. 그것은 그 시대의 수많은 영웅들의 만남이었다. 파리에는 수백 개의 다른 커피하우스가 있었는데, 일부 이름은 Magny's였으며 나중에 The Royal, Drummer, Eldorado, Scala, Bonner, Folies Bobino, Concert Europeen 및 가장 잘 알려진 Cafe de la Regence 등이 되었다. 많은 것들이 바뀌고, 팔리고, 옮겨지고, 다르게 만들어졌다.그러나 파리의 카페는 여전히 그 곳에 있으며, 도시의 매력적인 특징 중 하나이다.
유럽이 음료와 서비스에 대한 가장 낭만적인 아이디어를 얻은 것은 바로 동양의 커피 하우스에서였다. 이는 대중의 인기와 즐거움을 크게 더해주었다. 동양의 신비가 많은 관심을 받았던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특히 그러했다. 네덜란드에서는 1666년 암스테르담에서 최초의 커피 하우스가 시작되었으며, 약 20년 후에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진출했다. 커피는 터키와의 전쟁 직후인 1683년경 비엔나에서 음료로 등장했다. 그 후 커피 하우스가 오스트리아 수도에서 일반화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여기에서 그들은 번성했지만 결코 비엔나 특유의 것이 아니었고 비어 가든의 심장이자 영혼이었던 유명한 게무틀리히카이트 (Gemutlichkeit, 마음 편함, 쾌적)로 가득 차 있지도 않았다.
그 커피 하우스가 식민지 미국에 소개된 때는 정확히 그들이 비엔나와 베를린에 도착하던 무렵이었다. 그 시절은 그곳의 감동적인 시절이었고, 북미의 영국 식민지에 커피 하우스가 차례로 나타났다. 모두 잘 받아 들여진 영국과 유럽 기관의 디자인을 충실히 따랐다. 가장 유명한 옛 식민지 시대 건물 중 일부는 여전히 그 이름에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이름을 갖고 있다. 보스턴에는 The London, Gutteridge's, The Red Lion, King's Head, Indian Queen, Cole's가 있었다. 뉴욕 시 최초의 커피 하우스는 1696년에 문을 연 King's Arms였다. 브로드웨이의 트리니티 교회(Trinity Church)와 삼나무(Cedar) 사이에 위치 해 있었다. 나중에 잘 알려진 Exchange Coffee House를 포함하여 더 많은 사람들이 들어왔다. 1737년경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커피하우스인 The Merchants가 뉴욕에 설립되었다. 여기에는 미국 건국 초기 지도자들의 비즈니스와 정치 거래가 많이 있었다.
미국 식민지의 다른 지역에서도 커피 하우스가 발견되었다. 옛 퀘이커인 윌리엄 펜(William Penn)이 펜실베이니아와 델라웨어에 이들을 소개했다고 한다. 그들은 혁명 이후 시카고와 같은 더 큰 인구 중심지로 서쪽으로 퍼졌다. 이들 모두에는 전성기와 쇠퇴가 있었다. 지금은 예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지만, 커피를 파는 것 외에 음식점이나 주류 판매소로도 변모했다. 최근 오전과 오후 '커피 브레이크'의 큰 인기와 좋은 효과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면서 미국에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진정한 커피하우스의 모습이 다시 나타나고 있으며, 그 나라에서도 다시 널리 대중화될 가능성이 있다. 영국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오늘날 전형적인 커피 하우스는 파리 전역에 존재하며, 다른 유럽 수도에서도 더 많은 커피 하우스가 번성하고 있다. 포르투 갈은 대도시의 커피 하우스가 최고의 전통에 걸맞은 방식으로 계속되고 있는 현대 유럽 국가이다. 리스본에는 보기에도 좋고 튼튼하고 오래된 가옥이 많이 있으며, 그 유래는 지난 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 곳에서는 업무 담당자들이 사물을 논의하고, 사업을 거래하고, 경쟁의 긴장에서 회복하기 위해 온다. 그러한 시설 중 일부는 아름답게 꾸며져 있으며 일부는 침울하고 오래되었으며 일부는 반짝반짝 새롭다. 특별한 사람들을 위해 테이블이 예약되어 있는 곳도 있고, 유럽의 유명 인사들이 한 시간 정도 지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곳도 있다. 또한 전형적인 노천 카페도 있고, 일부는 소박한 곳도 있고, 다른 곳은 좀 더 과시적인(ostentatious) 곳도 있고, 일반 커피 하우스의 파생물들과 별관(annexes)도 있다.
다시 바다를 건너면 오늘날 라틴 아메리카의 많은 지역에 번성하는 커피 하우스가 산재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아주 작은, 심지어 낙후된 마을에서도 'tienditas de Cafe'를 찾을 수 있다. 일부는 작고 투박한 가구를 갖추고 있지만 공기는 커피콩을 볶는 증기로 가득 차 있다. 음료가 담긴 포트들은 항상 음료가 제공되는 장소 뒤편의 창고에 장작불 위에 준비되어 있다. 일부 수도와 주요 도시에서는 커피 하우스가 더 크고 정교할 수 있다.
유럽의 카페와 비슷한 길거리 카페(Sidewalk cafes)를 찾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에콰도르의 과야킬(Guayaquil) 항구는 노천 카페로 오랫동안 유명해졌으며, 엘살바도르의 산살바도르 (San Salvador)와 코스타리카의 산호세 (San Jose)와 같은 도시에서는 이러한 카페를 개조한 것에 대한 선호도와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 대부분의 중요한 마을과 도시에서 커피 하우스는 지역 사회의 사교 생활에 매우 중요한 기여를 한다. 콜롬비아와 브라질과 같은 나라들에서는 'tinto' 또는 'cafezinho'가 하루에 여러 번 작은 컵에 담겨 제공되며, 큰 사업과 사교적 고객이 가까이 있는 편리한 모퉁이에 있는 즐겨 찾는 커피 하우스에서 제공된다.
커피의 초기 역사, 커피의 발견과 열대지역의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의 분포는 아마도 모든 작물이 자랑할 수 있는 가장 흥미롭고 낭만적인 이야기일 것이다. 그 중 일부는 수년 동안 논의되었으며 유럽과 레반트 지역의 여러 언어로 작성되었다. 일부 이야기는 의심스러운 것으로 간주되며, 어떤 경우에는 상업 제품에 판매 매력을 더하기 위해 윤색되었다(embroidered).
여기서는 확실하지 않은 기초 문제를 걸러내려는 시도가 이루어졌으나 아마도 완전한 성공은 없었을 것이다. 거의 150개에 달하는 저작물 중에서 가장 중요한 저작물이 인용되었다. 해당 장의 주제를 자세히 다루려는 시도는 없다. 이것은 오히려 개요이다. 회고록처럼 그것을 완전히 다루려면 책 자체가 필요하다. 아라비카의 세계적 분포 중 일부가 차트 형식으로 표시된다 (Figure 2).
유럽 언어로 커피에 관한 최초의 작가 중 한 명은 Bradley (1716)였다. 그의 책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중요하며 Linnaeus의 책보다 먼저 나왔다. 그는 여행자였고, 자라면서 열매를 맺는 나무를 보고 연구했으며, 일부 안락의자 식물학자와 의료인들 보다 자신이 더 권위자라고 믿었다. 그는 그것을 Euonymo Similis Aegyptica fructu baecis Lauri Simili라고 묘사했던 Casper Bauhin에 대해 말했다. 그는 1622년 파킨슨병에 대한 설명을 인용하여 “헤이즐넛 열매보다 약간 크고 끝부분이 뾰족하며 회색 빛 재색을 띠는” 열매를 맺는 cArbor Bon이라는 나무에 대해 설명했다; 각 열매에는 두 개의 흰 씨앗이 들어 있는데, 터키인들이 그것을 마시며 그들 사이에서 큰 존경을 받고 있다. 그는 1691년 식물학자 Ray가 이것을 Coffee frutex, ex cujus fructu sit potus라고 언급했다고 말했다. 식물학적 배치에 대해 약간의 논쟁이 있었고 Bradley는 그것이 'Jessamines'로 분류될 것이라고 말한 학자 Comelin으로부터 개인적인 연락을 받았다. 브래들리가 알고 있던 재스민은 유럽의 전형적인 향기로운 꽃 관목인 반면, 커피는 나무였다.두 식물을 모두 본 사람에게는 몇 가지 큰 차이점이 눈에 띌 것이다.우리는 그가 자신의 목격자 설명을 제공했기 때문에 그가 Commelin의 말을 확신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는 점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암스테르담의 Physick Garden에는 각각 높이가 약 17피트인 두 그루의 커피나무가 있는데, 이 나무는 한동안 열매를 맺은 상태였으며, 대부분의 계절에 과일이 그들에게 달려있다.’ 의심할 바 없이, 이것들은 그곳의 온실에서 자라고 있었다. 그는 다른 인물들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그는 과일이 빨간색이라고 말했고, 잘 익지 않으면 노란색을 띤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한 다른 관찰자들이 자연의 나무들이 높이가 40~50피트까지 자라는 것을 보았다고 보고했다고 덧붙였다.
당시 일부 식물학자들은 이 나무가 아라비아에서 유래했다고 믿었지만, Bradley는 Poncet가 에티오피아로 항해하면서 '이 나무를 그 나라의 Native로 만든다'고 지적하는 것이 좋다고 느꼈다; 그때부터 아라비아 펠릭스 (Arabia Felix)로 이식되었으며 현재 에티오피아인들은 호기심으로만 재배한다. 이와 함께 그는 또 다른 작가인 Robert Balle 변호사의 말을 인용했다: ‘그는 커피가 세계 어느 곳에서도 자연적으로 자라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 않고 단지 Arabia faelix에서만 자생한다; 모코 (Moco)에서 그레이트 산맥의 계곡(Valley of the Great Mountains)과 북위 약 20도에 있는 도시 사나(Saana) 근처의 내륙으로 몇 일 동안 여행한다.’ 세계 무역을 위해 커피가 들어온 곳은 바로 이 아라비아 지역이었고, 그 땅의 주인들은 시장을 그곳으로 독점하기를 원했다.
아랍인들은 살아있는 열매나 씨앗이 해안을 떠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으며, 실제로 그러한 제거를 시도하다 적발된 불운한 사람들에게 가혹한 처벌을 가했다. Bradley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식물을 자신들에게 고유한 식물로 보존하기 위한 특별한 관리와 주의에도 불구하고, 네덜란드인들은 몇 년 전에 그것을 스스로 공급할 방법을 찾아 자바 섬의 바타비아 (Batavia) 근처에 농장을 만들었다. 몇 톤의 과일을 생산했다. 그들은 최근 이 농장에서 두 그루의 나무를 암스테르담으로 가져왔는데, 그 나무는 그들의 천재적인 정원사의 기술로 번성하고 완벽하게 열매를 맺었다. 수백 그루의 나무들이 씨앗에서 자라 그곳에서 익었다. 그리고 때때로 그들은 수리남 (Surinam)과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서인도 제도(West-Indies)의 장소들에 이를 전송한다.'
Bradley 자신도 암스테르담의 온실 커피에서 씨앗을 얻어 영국으로 가져갔다. 이 무렵에 The Tree가 실제로 아라비아에서 왔다는 믿음을 반복하면서 축적된 글이 있었고, Poncet가 그것의 기원지를 에티오피아라고 생각했다는 Bradley의 제안을 완전히 간과했다. Bradley가 인용한 것과 같은 식물학자들과 교사들의 관찰은 나중에 Linnaeus (1737)가 접근할 수 있었던 저술물이었다. 그 중 에세이의 수는 압도적으로 아라비아 기원을 선호했다. 나중에 Bradley 시대 이후, Linnaeus (1753)는 자신의 『Species Plantarum』에서 당연히 Coffea arabica라고 명명하고 서식지를 'Arabica felici'로 반복했다.
나는 C. arabica L.의 첫 번째 식물 표본에 대한 연구를 통해 그 출처와 Linnaeus가 특정 이름을 붙인 이유에 대한 추가 단서를 제공할 수 있기를 희망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다. 1956년에 나는 런던 린네 학회 (the Linnean Society of London)를 방문하여 린네가 종의 표본으로 장착한 원본 표본을 조사하는 특권을 누렸다. 흥미로운 시트에 있었다.
그 ‘exsiccate (바짝 마른 것)’는 Linnaeus의 손으로 ‘232’로 번호가 매겨져 있으며, ‘232 Coffea’, ‘233 Chiocea’, ‘234 Hameflia’, 그리고 ‘'235 Lonicera’라고 표시된 다른 세 개와 함께 패키지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 커피 표본은 특징적인 측면 자실 가지(lateral fruiting branch)의 말단 부분(terminal portion)으로 나중에 Cramer에 의해 묘사된 청동색 잎 끝의 Typica 품종의 비교적 섬세한 외관을 가지고 있었다. 이 가지 부분은 잘린 것이 아니라 부러진 것이었고, 한때 8개의 마디를 가지고 있었다. 맨 끝 마디는 작고 어렸음에 틀림없으며, 건조 후에는 쉽게 벗겨졌을 것이. 가지 밑부분에 있는 세 개의 가장 오래된 마디에는 각각 여전히 잘 성숙한 잎이 한 개씩 붙어 있었다. 다른 것들은 아마도 준비 중에 떨어졌을 것이다. 현재 존재하는 것들은 Linnaeus가 윗면을 사용하여 시트에 접착하여 잎의 모양과 특성 뿐만 아니라 巢穴들(domatia openings)과 葉脈(venation)을 볼 수 있다. 밭에서 자란 것처럼 보이지 않다. 표본을 수집할 당시 성숙한 잎은 몇 달 된 상태였다. 이 오래된 잎에는 몇 개의 작은 구멍이 있는데, 이는 분명히 온실에서 자라는 동안 곤충이 판을 뚫고 먹은 것 같다. 잎에 있는 구멍의 가장자리는 가지가 부러지기 오래 전에 아물었다. 이 세 개의 가장 오래된 마디는 겨드랑이에서 잘 성숙되었지만 열리지 않은, 일반적으로 배열된 꽃봉오리가 양초 단계(candle stage)로 부풀어오르기 직전에 있다. 정점의 4개 마디 (apical four nodes)에는 각각 2개의 잎이 있는데, 이 잎은 반-휴면기(semi-dormancy) 이후 새로운 성장의 특징적인 방식으로 확장되기 시작했다. 밑줄 친 ‘India’라는 단어는 대문자 없이 잉크로 다시 린네가 직접 쓴 작은 글씨로 보인다. 그 단어는 줄기 밑 부분의 시트에 직접 기록되어 있다. 내 생각에는 그가 Van Hoorn의 Praefectum의 소위 ‘India Oeientalis’라고 불린 것 또는 ‘India Occidentals, Colombo’라고 불린 것으로 말한 것에서 유해한 씨앗에서 나온 유럽 온실에서 자란 나무에서 이 가지를 얻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당시 그는 확실히 ‘India’ 매터리얼이 아라비아에서 유래했고 진행되었다고 믿었다. 페이지 하단에는 ‘arabica’라는 종 명칭이 적혀 있다. 이 시트는 조심스럽게 접힌 표지에 들어 있으며 왼쪽 상단에는 ‘232’라는 숫자가, 왼쪽 하단에는 ‘230 Coffea’라는 숫자가 표시되어 있다.
식물학자들이 잘 알고 있듯이, Linnaeus는 Coffea 속에 대한 설명을 발표한 후(1737) 그 속의 단 한 종만을 인정했으며, 그 종의 지리적 출처에 대한 믿음 때문에 그 종에 아라비카라는 이름을 붙였다.
나중에 그는 그 기원을 기록한 글(1763)에서 ‘Arabia’와 ‘Aethiopia’를 함께 결합했다. 그는 커피에 대한 가치 있는 정보를 출판하는 17명의 워커들을 언급했다. 하나는 1621년의 마이세네리움(Meisenerium)이었다. 가장 유명한 또 다른 사람은 1591년 Plantis Aegypti에서 이에 대해 쓴 Prosper Alpinus이다. 또한 1624년 De Coffee Potu에서 관찰한 베룰라니우스(Verulanius)도 주목할 만하다. Linnaeus는 1713년 Actis Parisinus에 출판된 왕실 식물학자 Antoine Jussieu의 회고록을 특히 중요하게 언급했다. 여기에서는 유럽의 온실에서 자란 두 번째 살아있는 표본으로부터 그 나무에 대해 설명하고 그렸다. 그가 인용한 마지막 보고서는 1755년 Kalmium의 보고서였다. Linnaeus는 그 이야기에서 에티오피아가 연관되어 있다고 느꼈지만, 그 나무가 아라비아에서 최초로 왔다는 것이 최선의 판단이라고 생각했다.
그 이후로 아라비카 커피의 기원지에 대한 재분석이 이루어졌다.
일부 학자들(cf. Ukers, 1922)은 현재의 에티오피아 부족 중 일부가 원래 아라비아에서 왔으며 초기에 커피를 가지고 에티오피아로 갔다고 주장했다. Lankester (1832)는 커피가 페르시아에서 아라비아로 왔다는 증거가 있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다른 사람(Porter, 1833)에 따르면 C. arabica가 아마도 먼저 에티오피아에서 페르시아로 옮겨졌고, 이 단계 이후에 아라비아로 옮겨졌을 것이라고 믿을 만한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비판적인 오래된 식물학자인 De Condolle은 이 커피가 원래 Abyssinia, 수단, 모잠비크 및 기니에서 야생이었다는 증거가 있다고 주장했다 (see Fauchere, 1927). 역사적 연구에서 Southard (1918)는 아랍인들이 11세기에 에티오피아의 Harar 지역에서 종자를 확보하고 아라비아에서 식물을 재배했다는 징후를 발견했다. 아라비아의 재배적 조건 하에서 자란 것은 여전히 유명한 큰 콩과 함께 특별한 품종의 커피였던 것 같다. 4세기 후에 그들은 경작과 활용을 위해 이 커피를 에티오피아로 가져갔다. 그 이유는 그 커피 콩이 일반 야생 커피 숲에서 수집한 것보다 훨씬 컸기 때문이다.
커피의 역사 속에서 지역에 대한 자부심이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것은 이해할 수 있으며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높이 말하고 있다. 오늘날까지도 이 작물이 아메리카 열대 지방에 많이 서식하므로 그 지역이 원산지임에 틀림없다는 진지한 진술을 가끔 듣는다. 적어도 프랑스가 도입되기 오래 전에 아메리카 대륙에 있었을 수도 있다는 추정 문서 증거에 대한 언급도 있었다. 예를 들어, Tigerino (1954)는 이러한 가능성에 대한 증거로 1632년에 나타난 Los Viajes de Tomds Gage en la Nueva Espanay 등의 옛 도미니카인의 글을 인용한다. 그 책에는 멕시코를 광범위하게 여행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으며, 그중에는 Coban의 수도인 베라파즈(Verapaz)에서 발견된 주요 식물 산물인 아치오테(achiote), 카카오, 목화, 꿀, 커피, 사르사파릴라(sarsaparilla), 옥수수(maize)가 언급되어 있다. 믹스코(Mixco)와 피놀라(Pinola) 지역을 방문했을 때 '폭우로 인해 많은 밀이 망가졌고 인디언의 커피 농장에 땅이 생겼다'는 보고가 있었다. '커피'가 정확히 어떤 작물을 가리키는지 아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어떤 종의 커피나무가 아닌 다른 것으로 보인다. 양쪽 반구에서 주의 깊게 수집된 모든 식물학적 증거는 커피가 사람의 손으로 제대로 인증되지 않고는 1714년에 아메리카 해안에 전해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C. arabica가 처음 진화한 곳에 대한 가장 완전한 정보 중 일부는 Chevalier (1929)에 의해 리뷰되었다. 그는 탐험가와 식물학자의 관찰에 대해 논의하고, 커피의 분명한 자연 발생에 대한 출판물을 발표했다.
Poncett는 1698년부터 1700년까지 에티오피아에서 야생으로 자라는 것을 목격했다.
예멘의 C. arabica 나무에 대한 최초의 기술적 설명은 1712년 외과의사 Barbier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이 나무는 야생이 아니고 그곳에서 재배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제임스 브루스 (James Bruce)는 1762년 에티오피아에서 재배를 제시하지 않고 자연에서 아라비카가 자라는 것을 보았다. 그 나무는 언제나 세심한 주의와 관개를 필요로 했던 아라비아 펠릭스에서 자랄 수 있었던 사막 식물이 아니라, 숲의 하부에 서식한다는 증거를 보여주었다.
커피에 대한 지리학적 연구에서 Fuchs (1886)는 Galla, Enarea, Kaffe, Raume, 그리고 에티오피아의 기타 지역에 있는 소위 Abyssinian highland라 불리는 지역에서 C. arabica의 기원에 대한 좋은 증거를 수집했다.
Chevalier (1929)는 지난 세기 중반 Victoria-Nyanza 지역과 아프리카 중앙지역에서 자생 커피 농장을 본 탐험가 Grant와 Speke의 경험을 관계시켰다. 그 이후로 이 사람들이 반드시 그곳에서 아라비카를 본 것이 아니라 다른 종을 본 것이 분명해졌다.
아주 최근에 Sylvain (1956)은 문헌, 원예학 및 생리학적 사실로 판단할 때 C. arabica가 현재의 나무와 마찬가지로 다소 사막 지역인 예멘이나 고대 Arabica Felix에서 유래했을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A. S. Thomas (1942)는 C. arabica가 자연 조건에서 자라는 곳이 Sudan까지 뻗어 있는 Ethiopian hills의 작은 부분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자연림의 일부로서 대량으로 자연적으로 발생하고, 그곳의 조건에 대한 적응력과, 옛날부터 의심할 여지 없이 토착적 존재였던 현상으로 판단할 때, 에티오피아의 하이랜드들, 그리고 Sudan 남부까지의 남쪽의 연결지대가 C. arabica 종의 탄생 중심지로 조금도 거리낌 없이 생각된다.
그러나 이 사건은 이 중심에서 수백 마일 떨어진 곳에서 오랫동안 자연적으로 발생했을 가능성이 있다. 아마도 그것은 에티오피아와 수단 남동부의 산과 고원에서 멀리 남쪽에 있는 다습한 숲까지 확장되었을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C. arabica인 에티오피아 외부에서 발생하는 몇 가지 커피들이 있지만, 식물학자들이 이를 다른 품종이나 종으로 묘사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다르다. 그 중 하나가, 천연 C. arabica 발생 지역으로 인정된 곳에서 남쪽으로 약 300 또는 400 마일 떨어진 Ruwenzori 산악 지역의에서 나온 Uganda 매터리얼로부터 A. Froehner에 의해 1895년에 설명된 C. arabica var. intermedia인데, 커피들에서의 변이들의 상세한 내용들에 대한 우리의 위대한 중요한 평가자이었던 Cramer (1957)는 그 변종은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지만 다른 종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Ruwenzori 지역에서 남쪽과 서쪽으로 150마일 이내에서 C. arabica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다른 변종 커피들이 얻어졌다. 이것을 어떻게 발견했는지에 대한 Lebrun (1941)의 설명에 따르면, 이것들은 Congo의 Lake Kivu 지역의 고지대에서 확실하게 자연적으로 발생한 것이다. 그 중 특정 특성은 아라비카와 충분히 다르기 때문에, 그는 하나는 C. kivuensis로, 다른 하나는 C. vanroechoudtii로 설명했다.
많은 연구 후에도, 일부 식물학자들은 이를 여전히 종으로 유지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이를 형태학적 기반에 따라 차별화된 변종으로 간주하며, 아마도 오랜 지리적 고립의 결과로 다양해졌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주요 목적을 위해, 에티오피아의 산악 지역이 여전히 C. arabica 기원지로 생각된다.
이 커피는 탄생한 높은 언덕에서 인류의 노력에 의해 전파되었으며, 논의의 편의를 위해 열대 세계에 걸친 8개의 웨이브라고 표현한다. 첨부된 차트(Fig. 2)는 아라비카가 어떻게 전파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웨이브 중 일부는 초기에 발생했으며, 지속 시간이나 범위가 약간 컸다. 일부는 광범위하고 그 나무가 지금까지 도달한 곳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까지 있었다.
아마도 첫 번째 물결은 원주민들(aborigines)이 에티오피아에서 현재의 Mozambique 지역으로 씨앗을 가져간 다음 Madagascar로 가져가면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후자의 연대는 1717년경으로 제시된다.
두 번째 이동은 가장 오래 지속되었다. 그것은 페르시아 군대가 에티오피아의 하라르(Harar) 지역에서 나온 씨앗을 운반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들은 AD 575년경, 그리고 다시 890년경에 씨앗을 Arabia Felix로 가져갔다. 그곳에서 자라서 (대략) 1500년부터 1550년까지 레반트의 다른 많은 땅으로 옮겨졌다. 네덜란드와 프랑스의 들판에서 일부 시도들이 이루어졌으나, 서리로 인해 커피 종자들이 죽었고, 1696년에는 실패로 판정되었다. 그 시점에서 이 단계는 끝났다.
세 번째 전파 움직임은 짧았으며, 두 번째 단계의 마지막 부분에서 진행되었다; 그것은 인도 제국의 널리 퍼져 있고 접근하기 어려운 지방, 프레지던시, 스테이트 및 라지 (provinces, presidencies, states, and rajs)으로의 씨앗의 더 성공적인 전달이었다.
작지만 오래 지속되는 또 다른 물결인 네 번째 물결은, 예멘으로부터 아라비카 종자로 다시 시작되었다. 그들은 마스카렌 제도(Mascarene islands)의 부르봉 섬(Bourbon)과 모리셔스 섬(Mauritius)으로 이송되었고, 그곳에서 장거리 운송을 통해 인도양과 남중국해를 거쳐 인도차이나까지 이송되었다. 이 물결은 1715년경에 시작되어 다음 세기 말까지 지속되었다.
사람이 운반한 씨앗의 물결 중 다섯 번째 물결은 아마도 가장 인상적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1706년경에 에티오피아에서 자바를 거쳐 유럽으로 가져온 한 그루의 나무로 시작되었을 것이다. 네덜란드인, 프랑스인, 영국인, 스페인인, 포르투갈인들의 결합된 노력을 통해 2점 이상의 이동이 완성되었다. 그것은 18세기 내내 지속되었으며, 종자 분포와 증식은 20개의 국가들과 섬들에서 아메리카의 열대 지방을 수십억 그루의 나무로 뒤덮는 놀라운 위업을 가져왔다.
지구 반대편에서는 18세기 말에 이 작물의 여섯 번째 침투가 일어나고 있었다. 열대 태평양의 섬, 군도, 본토는 아라비카 커피의 도입으로 농업 혁명이 한창이었다.
배회 역사의 일곱 번째 단계는 지난 세기의 마지막 분기와 현재의 첫 해에 발생한 파동이었다. 프랑스, 영국, 독일, 보어, 벨기에 혈통의 재배자들은 중앙 및 동부 아프리카와 콩고의 농업적 부를 늘리기 위해 씨앗을 얻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시작된 최근의 물결은 다른 아프리카 국가에 종자를 보낸 에티오피아의 군인들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현재는 과학적인 농업학자들이 이끌고 몇몇 국가의 사람들이 전세계 여타 열대 워커들과 협력하여 수행되고 있다.
C. arabica의 이동 역사와 관련하여 가장 확실하게 인증된 시기 중 일부는 여러 작가에 의해 검토되었다 (Porter, 1833; Chevalier, 1929; Ukers, 1922; Cheney, 1925; Hille Ris Lambers, 1930; Stanford, 1934 참조). 및 Coste, 1955). 16세기 후반과 17세기 초에 많은 일이 일어났다.
1554년에는 아라비아에서 들여온 커피를 콘스탄티노플에서 마셨다. 그곳의 Grand Bazaar로부터 베니스에 1560년에 도입되었다. 이 음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었고, 항상 진취적인 네덜란드인은 이 음료의 추가 상업화 가능성을 검토해 왔다. Jacob (1935)에 따르면 그들은 1690년에 아라비아에서 암스테르담으로 커피나무를 가져왔지만 단지 식물학적 호기심일 뿐이었다. 그들은 곧 커피나무의 표본을 확보하고 열대 국가마다 하나씩 성장을 테스트하기 시작했다. 1690년경에 그들은 자바에서 커피를 시도했지만 폭풍으로 인해 첫 번째 나무를 잃었다. 그러나 아라비아에서 Batavia로 직접 가져온 일부 묘목은 1699년에 마침내 잘 자리 잡았다. 그때부터 다음 2세기 동안 아라비카 커피가 취하는 단계는 점점 더 빨라지고 많아졌다.
Java의 Batavia에서 아라비아 커피 묘목들의 식재들은 바타비아 주지사 반 호른(van Hoorn)의 노력을 통해 아라비아 펠릭스로부터 확보되었다. Linnaeus (1763)가 쓴 것은 바로 이 매터리얼이었다. van Hoorn의 이 작업은 농작물에 있어 가장 놀라운 일이었다. 1706년에 그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Dutch East India Company)의 최고 총독이기도 한 암스테르담의 시장 (Burgomaster) 니콜라스 비첸 (Nicolas Witsen)에게 나무 한 그루를 보낸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네덜란드의 Physick Garden에서 얻은 호기심 많은 식물이었다. 다행스럽게도 그 나무는 자가 호환이 가능한 종에 속했다. 충분히 자라자마자 온실에서 자가 수정된 씨앗을 낳았고, 많은 수가 멀리 보내졌다. Porter (1833)에 따르면, 일찍이 1718년에 식민지 주민들이 수리남 및 여타 네덜란드 서인도 제도 국가들, 그리고 수마트라에서 농장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 사이 다른 유럽 식물원에서도 몇 그루의 묘목이 목격됐다. 그 중 하나는 자손들의 멋진 여행 때문에 특별히 흥미롭다.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1706년 Java에서 선적된 Burgomaster Witsen의 이 나무 한 그루에서 놀라운 자손의 긴 계통이 나온다.
이것은 원래 에티오피아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며, 아마도 Harar 지방에서 나온 묘목일 것이다. 그것은 우수한 품질의 훌륭하고, 굵고, 큰 콩을 생산하는 종류였다. 온실에 열매가 맺혔을 때 씨앗이 발아되어 화분에 심겨졌다. 이들 중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하여 왕실 수출품으로 사용했다.
수출을 위한 첫 번째 시도는 1712년에 있었는데, 당시 관리 부실로 인해 운송이 실패했다. 1년 후, 아마도 더 숙련된 후원 하에 시도되었으며, 1713년에 5피트 높이의 나무가 루이 14세 왕이 살았던 프랑스의 유명한 샤토 뒤 마를리(Chateau du Marly)에 적합한 선물로 성공적으로 보내졌다 (see p. 19).
이 한 그루의 나무는 루이 14세의 의지에 따라 아메리카 열대지방 전체와 다른 많은 열대지역에서 커피의 조상이 될 운명이었다. 이에 대한 가장 초기 기록 중 하나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루이 14세의 식물을 수마트라의 식민지 중 하나로 가져 간 1714년이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그 고귀한 나무로부터 출발한 최초의 프랑스 식민지는 마르티니크 (Martinique)였으며 이는 낭만적인 사건이었다. Jardin des Plantes로부터 화분에 심은 묘목 몇 개는 당시 항해 선박 중 하나를 타고 바다를 건너기 위해 해군의 책임 있는 한 勳爵士 (슈발리에, Chevalier)에게 주어졌다. 이 묘목은 모든 관리를 받아야 했다. 이것은 1720년이나 1723년이었고, 수호자는 슈발리에 가브리엘 마티유 드 클리외 (Gabriel Mathieu de Clieu)였다. 그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그는 나무 한 그루만 남기고 모두 잃었다. 배가 未道無風帶(doldrums)에 들어서서 돛이 느슨해지고 열기가 거의 견딜 수 없는 상태로 몇 주 동안 유리 바다 위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식수는 부족했고 모두 배급량이 거의 없었다. 한 미친 승객은 드 클리외가 매일 마시는 물의 절반을 나무에 주는 것을 보고 그 나무를 파괴하려고 시도했다. 나뭇가지 하나가 뜯겨 나갔지만 선주는 그를 쫓아냈고, 배의 선원들은 그 미친듯이 구는 사람(demented man)으로부터 나무를 지키는 것을 도왔다. 배는 마침내 수척한 슈발리에 (gaunt chevalier)와 그의 살아있는 커피 묘목을 가지고 마르티니크에 도착했다. 그는 왕에 대한 책임을 다했으며 살아있는 커피나무 표본을 고향 섬으로 가져왔다.
드 클리외가 직접 가꿀 수 있는 곳에 이 나무를 심었고, 잘 자랐다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 도입의 정확한 날짜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만, 더 확실한 정보는 그것이 1726년에 처음 결실을 맺었다는 것이다. 그것의 첫 번째 씨앗들이 모두 심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용맹하고 작은 슈발리에는 곧 커피를 재배하는 넓은 필드를 갖게 되었고, 다른 사람들에게 커피를 분배하기 시작했다. 마르티니크 커피나무는 번창했고, 50년 만에 그 섬에만 약 1,900만 그루의 커피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루이 14세의 유증(bequest)으로 커피나무가 인근 프랑스 섬인 히스파놀라(Hispanola) 또는 현재 아이티(Haiti)로 알려진 생도밍그(Saint Domingue) 섬으로 보내졌다.
이제 프랑스인들은 풍부한 커피 종자 공급원을 보유하게 되었다. 그들은 신속하고 집중적으로 작물을 연구했으며, 네덜란드 및 기타 출처로부터 정보를 얻었다. 그들은 루이 14세의 ‘고귀한 나무’가 직접 낳은 자손을 급속히 증가시켰고, 1715년부터 1717년까지 그것을 Island of Bourbon (부르봉 섬) 지금은 레위니옹(Reunion)으로 알려진 곳으로 보냈고, 그것은 더 동쪽으로 갔다. 예를 들어, 그것은 1740년에 타히티(Tahiti)로 보내졌다. 동양의 식민지 개척자들은 수익성 있는 작물을 요구하고 있었다. 커피의 성장이 이해되기 시작했고, 음료의 인기가 높아지고 있었다. 그것은 현명한 주의 하에 자라났으며, 그들의 기도에 응답되었다. 동시에 그 나무는 멕시코로 옮겨졌다. 한 세기가 넘어, 1887년에는 부르봉에서 인도차이나로 옮겨졌다.
오랫동안 확립된 네덜란드와 프랑스 식민지 재배자들은 아마도 아라비카 커피의 가장 진지한 디스트리뷰터들이었을 것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유일한 소스는 1706년 바타비아의 반 호른(van Hoorn of Batavia)으로부터 받은 암스테르담 온실 재배 나무 한 그루 뿐이었다. 그것은 아마도 Bradley (1716)가 묘사한 바로 그 나무였을 것이다.
그 자손이 1718년에 네델란드령 기아나(Dutch Guiana) 또는 수리남(Surinam)에 도입되었다. 그로부터 몇 년 전에는 프랑스령 기아나(French Guiana)의 따뜻한고 저지대 항구 도시인 카이엔(Cayenne)으로 옮겨졌으나 그곳에서는 잘 자라지 못했다. 5년 후, 카옌의 커피 재배를 브라질 도시 Belem do Para 주변 지역에 소개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카옌에서 커피가 그저 그렇게 재배되었다면, 훨씬 더 큰 더위와 거의 일년 내내 비가 내리는 Belem의 열악한 상황은 심각한 실패를 초래했다. 한편 이 소식은 불안한 포르투갈인 농민들에게 남쪽으로 전해졌고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희망을 버렸다.
그러나 다른 나라에서 커피가 자라는 것을 보고 새로운 농장에서 커피를 재배할 수 있다고 확신한 브라질 사람들도 있었다. 1720년~1730년 사이의 언젠가(애국자들은 1727년이라고 한다), 프란시스코 데 멜로 팔헤타(Francisco de Melho Palheta)라는 이름의 매력적이고 상냥한 특사가 카이엔(Cayenne)으로 파견되었다.
그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프랑스령 기아나에 대한 외교적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으며, 그 과정에서 그의 매력적인 성과를 널리 활용했다. 그의 황제는 브라질 제국에서의 새로운 테스트를 위해 카옌의 부실하게 자라는 나무들에서도 커피 종자를 확보하는 데 간절했다. 아무도 그 일을 모두 기록하지 않았지만, 그 낭만적인 사절(romantic envoy)은 그 목적을 위해 신중하고 영리하게 작업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프랑스 총독의 젊은 아내의 사랑스러운 시선을 사로잡았다. 매혹적인 자질을 통해 de Melho Palheta는 우정을 얻었고 그에게 커피 씨앗들과 나무들을 멋진 한 다발의 꽃들에 숨겨 선물로 보냈다. 그는 이것을 브라질로 신속하게 발송했다. 그는 Belem에서 멀리 떨어진 Para의 더 건조하고 더 남쪽에 있고 더 시원한 곳으로 그것들을 보냈다. 그것들은 심어졌고 곧 Cayenne의 어미 나무들보다 훨씬 더 잘 자라서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다음 이동은, 1770년에 더 남쪽으로 더 시원한 지방인 마나오스 (Manaos) 지역의 좋은 땅에 있는 아마존 강 상류로 향했다. 그곳에서는 식물이 적당히 잘 자랐다.
커피는 황금빛 미래를 가진 작물이고 씨앗은 마나오스 플랜팅에서 수집된다는 것이 금방 분명해졌다. 그들은 1774년에 배를 타고 아마존을 따라 바다로 나가 브라질의 돌출부를 거쳐 리우데자네이루(Rio de Janeiro)까지 데려갔다. 그곳에서는 마나오스 (Manaos) 보다 수확량이 훨씬 더 많았다. 1787년에는 바이아(Bahia)로 옮겨졌다. 1782년과 1880년에 비록 Pestana (1927)가 상파울루에서 커피에 대한 첫 번째 언급은 1797년이라고 말했지만, 커피는 가장 큰 발달의 땅인, 상파울루 (Sao Paulo)로 옮겨졌다. 훨씬 더 건조하고 시원한 상태의 이곳에서는 20억~30억 그루의 커피나무가 자라왔고, 지금도 자라고 있다.
그 즈음 몇 해에 걸쳐, 커피 종자는 수마트라(Sumatra)와 아마도 고아(Goa)에서도 브라질로 들어왔다. 두 원천 모두 Yemen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그곳에서 고귀한 아라비카 품종이 탄생했다.
한편 브라질은 1825년에 하와이(Hawaii)에 종자를 보냈다. 브라질에서의 이러한 일들은 모두 브라질이 포르투갈의 정치적으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동안 일어났다. 브라질은 본국의 농업 보물이었고, 리스본(Lisbon)에서는 경외심을 가진 본국에 있는 사람들에 의해 ‘sua vaca de kite’라고 불렸으며, 웅장하고 엄청나게 큰 개척지였다. 고귀한 품종의 커피에 금의 최고의 손길을 더해 포르투갈 사람들이 유럽 문화의 생활과 사치를 위해 머나먼 브라질에 있는 제국에 그 어느 때보다 더 감사하게 의존하게 만들었다. 부분적으로는 커피 부의 급증으로 인해 브라질 제국은 포르투갈 세 왕국 중 하나가 되었다.
이러한 일들이 브라질에서 발생하는 동안, 영국인 Sir Nicholas Lawes가 마르티니크 (Martinique)로부터 커피 종자를 확보했다. 이는 자메이카를 위한 것이었는데, 자메이카는 1730년이나 1732년에 커피가 도입되었다. 그곳에서 이후 다른 영국의 서인도 제도 섬들로 이동했다. 약 50년 후, 이 고귀한 커피의 후손들은 프랑스 신부들에 의해 마르티니크에서 베네수엘라로 옮겨졌고, 그 직후인 1790년에 다시 멕시코로 옮겨졌다. 그러나 멕시코는 이미 1740년에 성공적으로 도입되었다. 사실은 1744년에 처음으로 도입된 나무의 씨앗도 필리핀으로 옮겨진 것이다. 스페인 사람들은 이 섬들에서 아라비카 커피 재배와 수출을 가능한 한 빨리 강요했다. 이것은 모두 역사의 고귀한 커피였다. 그것은 자가 수정된 나무였으며, 상속받은 순혈성을 유지하고 어디를 가든 성장 특성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 아라비카 나무들은 지금은 현대 아이티(Haiti)의 일부이지만, 당시에는 프랑스령 생도맹그 섬 (French island of Saint Domingue)이었던 테리어 루즈 (Terrier Rouge)의 그늘진 정원에서 재배되고 있었다. 왕실의 생각은 부의 생산을 늘리기 위해 그곳에 커피를 도입하는 것이었다. 신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유럽인 정착지의 이 부분은 실제로 프랑스 제국의 부유한 일부였다. 저지대 테리어 루즈(Terrier Rouge)의 더운 계절에는 커피가 잘 자라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식민지로 보내지는 것 외에도 생도맹그 (Saint Domingue)의 돈돈 지역(Dondon area)으로 옮겨져 그날부터 오늘날까지 번성했다.
1726년에는 과달루프 (Guadaloupe)에 있었다. 커피는 신세계 곳곳에서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서인도 제도의 옛 프랑스인 정원사와 과학자 들에게 큰 영예를 돌려야 한다. 그들은 기술이 뛰어나고 이 새로운 작물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물론 그들은 왕실의 후원과 파리 식물원에서 나온 정보를 통해, 그리고 프랑스의 원예 전문성을 통해, 자극과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도 연구했다. 그들은 그것을 좋아했다. 그들은 그것을 알기 위해 배웠다. 이때 스페인에서 온 방문객들이 생도맹그 (Saint Domingue)를 방문했고 그곳에서 작고 아름답고 생산성이 높은 아라비카 나무를 보았다. 이것들은 바로 고귀한 혈통에서 나온 것이었고, 유럽 무역에 그 제품을 공급하고 있는 불안한 재배자들의 돈 상자를 채워주겠다고 약속했다는 것은 명백했다. 커피는 빠르게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작물이 되었다.
아마도 테리어 루즈 (Terrier Rouge)에서 나온 커피의 첫 번째 단계는 쿠바(Cuba)였을 것이다. 1724년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 신기하게도 도입된 그 나무들은 그다지 잘 자라지 않았다. 역사는 그 이유를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은 더워서 커피가 고생했던 건조한 붉은 저지대에 심은 탓이 아닐까 싶다. 더욱이, 그 부분에서 사탕수수는 번성하여 다른 유형의 농업을 방해하는 아주 수지 맞는 일 (bonanza)이었다. 곧 초기 쿠바 커피 재배는 실패했다; 그러나 몇 개의 씨앗이 저장되어 1748년에 코스타리카 (Costa Rica)로 보내졌다.
Costa Rica에서는 커피가 처음에는 햇빛 아래에서 재배되었지만 최상의 결과는 없었다. 그러나 나중에 커피의 고갈에 대한 연구에서 그늘을 만들어 작물을 저장하고 정착시켰다. 쿠바에서도 처음에는 결과가 좋지 않았다. 단, 커피에 대한 관심이 사탕수수에 의해 압도되어 아무도 그늘의 도움에 많은 생각을 하지 못했다. 1748년부터 1750년까지 쿠바로 새로운 재수입이 있었다. 그들은 테리어 루즈에서 다시 왔지만 쿠바 섬의 더 높고 습기가 많은 지역으로 갔다. 그곳에는 고귀한 아라비카 품종이 정착되어 더 시원하고 그늘진 언덕을 통해 퍼져 나갔으며 그 이후로 계속 남아 있다.
스페인 선교사들 (Spanish missionaries)은 쿠바에서 생산된 최초의 종자 중 일부를 푸에르토리코 (Puerto Rico)와 과테말라 (Guatemala)의 새로운 지역으로 가져갔다. 이러한 도입은 1750년부터 1760년까지 10년 동안 어려움을 겪고 있는 식민지 주민들의 농업을 돕기 위한 것이었다. 푸에르토리코에서 이 나무가 1760년경 엘살바도르(El Salvador)에 도착하여 자손을 보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지능과 기술을 바탕으로 재배되었으며, 1780년에는 그곳의 커피가 상업적으로 유명해졌다. 당시 과테말라(Guatemala)가 처음으로 엘살바도르로 (El Salvador)부터 종자를 확보했고, 엘살바도르와 연줄이 있었던 콜롬비아인들도 1780~1790년 사이에 종자를 확보했다고 한다. 과테말라 종자는 1796년에 코스타리카에서 입수되었고, 1808년에는 코스타리카에 또 다른 수입품이 입수되었다.
초기 콜롬비아 농부 중 일부는 그늘 없이 처음으로 식물을 재배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나무들은 대량 생산에 돌입했지만 곧 약화되어 많은 나무들이 죽었다. 파종을 다시 해야 했다. 엘살바도르의 경험을 통해 그늘진 식재가 점점 더 유행하게 되었고, 초기 실패는 다시 엘살바도르에서 재수입된 종자를 통해 보충되었다. 이 무렵, 인간은 아라비카 품종을 재배하는 데 있어 특정 환경에 대한 재배적 제한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이 모든 시간 동안 커피는 이곳저곳으로 보내졌다. 일부 이동은 다른 이동들보다 훨씬 더 멀었다. 1893년에 과테말라 종자가 하와이(Hawaii)로 옮겨졌다. 커피는 세계 무역에서 그 중요성이 점점 더 커지고 있었고, 유럽과 미국의 대도시에서는 처음에는 수백 톤, 곧 수천 톤 단위로 커피를 요구하고 있었다. 노동력은 저렴했고, 그들이 알았던 한계들 하에서 재배자들은 이 아라비카 계열의 경우 포레스트 재배와 거의 유사한, 단순하지만 더 확실한 재배 시스템을 배웠다.
이 똑같은 원더풀 커피는 성공적으로 테스트되었고 다른 나라에서도 부러워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콜롬비아가 더 많은 곳에서 작물을 재배할 수 있도록 커피 종자를 제공할 차례가 되었다.
1784년에 커피는 그곳에서 파나마 (Panama), 에콰도르 (Ecuador), 볼리비아 (Bolivia)와 같은 나라들로 옮겨졌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칠레 (Chile), 페루 (Peru), 파라과이 (Paraguay)에서 그 작물을 시험하기 위해 브라질 종자를 얻었다. 이 아라비카는 머지않아 들판에 수십억 그루의 나무를 심을 수 있었다.
브라질은 1760년경에 커피의 일부가 고아 (Goa)에서 시작된 커피를 확보했다고 한다. 이곳은 인도 서해안의 중간쯤에 위치하고 아라비아 해를 바라보는 작은 저지대 포르투갈 영지(enclave)이다. 인도는 1600년 메카(Mecca)로부터 ‘seven seeds’를 가져와 인도 언덕의 Chikmagalur 근처 철학자의 동굴 근처에 심은 성자 Baba Budan으로부터 첫 번째 커피를 받았다. 어떤 사람들은 그곳에서 처음에는 Travancore와 Malabar, 그 다음 Pondicherry와 Talicherry, 나중에는 Central Provinces와 Goa로 계속해서 퍼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믿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 지역의 커피는 세계 다른 지역의 커피와는 다른 아라비카 품종일 수도 있다. 그것은 아마도 에티오피아의 하라르(Harar)에서 확보되기 오래 전인 메카(Mecca)의 씨앗에서 유래되었을 것이다. 이는 현재 예멘(Yemen)이라고 불리는 오래된 아라비아 펠릭스(Arabia Felix)를 통해 왔다. 그러나 하라르(Harar)에서 가져온 이것조차도 근본적으로 아메리카 대륙과 세계의 다른 지역의 귀족나무가 나온 동일한 기본 지역에서 나온 것이다. 여기에 제시된 인도의 이러한 단계들은 확실성이 다소 모호하다. 루이 14세가 1714년경 퐁디셰리(Pondicherry)에 커피를 보냈다는 더 분명한 증거가 있다.
그 오리지날 나무의 자손이 파리 Jardin des Plantes의 오래된 온실로부터 왕실 디자인으로 처음으로 프랑스의 아프리카 지방으로 퍼진 방법은 놀랍다. 루이 왕의 특별한 나무로부터 나온 묘목들이 마르티니크(Martinique)로 갔을 때 비슷한 자손이 프랑스령 중앙아프리카로 직접 보내졌다. 그곳에서 그들은 100년 넘게 재배되고 수확되었으며, 1878년에 당시 British Central Africa로 알려졌던 곳으로 옮겨졌고 그곳에서 멀리 남쪽으로 나탈(Natal)까지 옮겨졌다. 1895년에 프랑스 종자는 선교사들에 의해 영국령 동아프리카의 케냐(Kenya)로 옮겨졌다. 그곳에서 콩고(Congo)로 갔다가 앙골라(Angola)로 옮겨졌다가 다시 아프리카 대륙을 건너 모잠비크(Mozambique)로 옮겨졌다. 영국령 동아프리카와 콩고 지역은 1901년에 레위니옹 섬, 즉 브루봉 섬으로부터 종자를 수입했다. 이런 식으로 아주 우회적인 방식으로 그들이 프랑스령 중앙아프리카 근처로 처음 수출되었을 때 존재했던 것과 동일한 유산의 씨앗이 그들에게 돌아왔던 것이다.
이 씨앗들은 모두 1713년 루이 14세(King-Emperor Louis XIV)가 젊은 교수 드 쥐시외 (Professor de Jussieu)의 손에 맡긴 나무에서 직접 유래되었다. 비록 정글과 고지대를 통과하는 험난한 여정이기는 하지만 불과 수백 마일 떨어진 곳, 에티오 피아 언덕들에서, 농민들의 손길이 닿지 않고 원주민들에 의해 수확되지 않은 채 아라비카 야생 나무들이 여전히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더욱 놀랍다. 플랜테이션 재배의 문제들에 관해 연구하는 현대 과학자들은 이 나무의 원래 야생 성장이 어떻게 나타났는지 점점 더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고도로 정제된 유산을 더 다양한 타입들의 아라비카 계열을 통해 다시 활기차게 하는 것이 좋은 계획이 아닐지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본 리뷰에서 알 수 있듯이, 실질적으로 말해서 상업용 아라비카 커피는 모두 원래 한 나무에서 나왔다는 논리적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것은 자가수분(self-pollination) 조건 하에서 씨앗을 맺을 수 있는 나무였다. 씨앗에서 쉽게 자라고,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쉽게 배포되었으며, 표준적이고 고품질의 향기로운 커피를 생산했다. 현재 첫 번째 나무의 후손인 이 나무는 수십억 그루에 달하며, 각 나무는 매년 1파운드 미만에서 몇 파운드까지의 커피를 생산한다. 이들 모두는 어느 곳에서 발견되든 하나에서 나왔기 때문에 하위 계통이나 돌연변이가 있더라도 모두 동일한 계통에 속한다. 이것은 아마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다른 어떤 작물의 경험보다도 더 고귀하고 소중히 여겨지는 품종이다.
C. arabica는 습성상 자가수분을 하기 때문에, 이것이 자라는 50여 개국의 어느 지역에서든 티피카 (Typica) 또는 브루봉 (Bourbon) 타입의 나무는 유전적 구성에 있어 놀라운 안정성을 가지고 있다. 플랜테이션 성장에서 돌연변이가 발생한 기이한 왜소종(eccentric dwarfs), 자이언트, 성장 및 색상 변종들은 기본적으로 1713년에 위엄있는 존재 프랑스의 루이 14세에게 제시된 묘목과 동일한 계통이다. 이제 커피 원예가들이 이보다 더 많은 작업을 시작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그들은 커피 포레스트들의 셀 수 없이 많은 야생 나무 중에서 더 좋고, 더 강하고, 더 저항력이 있는 품종을 확보하기 위해 에티오피아와 그 탄생 지역으로 돌아가고 있다. 마찬가지로, Mozambique의 지방들과, 인도 마이소르 주( Mysore State), 그리고 레위니옹 (Reunion), 타히티 (Tahiti), 마다가스카르 (Madagascar) 섬들에서 발견될 수 있는 아라비카 품종의 차이에 대한 관심이 다시 일고 있다. 이들은 모두 에티오피아에서 원래의 아라비카 소스를 얻었지만, 아마도 커피계에서 잘 알려진 귀한 계열들을 공급하는 나무들과는 다른 나무에서 얻은 것일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도래하면서, 아프리카의 노련한 커피 산업 베테랑들은 원래 아라비카 재배지역을 방문할 수 있는 거리에 있는 해당 대륙의 군대에 합류했다. 에티오피아와 수단(Sudan)의 여러 곳에서 야생 나무의 씨앗을 채취하여 케냐와 콩고의 키부 지역(Kivu region)으로 가져오거나 보냈다.
그 이후로 에티오피아에서 C. arabica의 다른 계통이 들어왔다. 이는 노블 품종과 다른 아라비카의 원천이다. 하지만 최근에야 확보됐고 아직까지 관찰 단계에 머물고 있다. 세계 시장에 관한 한 상업용 아라비카는 에티오피아의 하라르(Harar)에서 시작된 수십억 그루의 나무에서 유래한다. 반복할 위험을 무릅쓰고, 정확한 이야기가 오래 전에 사라졌던 바로 이 시작은 아마도 한 그루의 나무에서, 아니면 기껏해야 몇 그루의 나무에서 나왔을 것이고, 만약 그렇다면 이것들은 단 한 그루의 나무에서 나온 한 줌ㅇ늬 씨앗들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해두겠다.
주목할만한 상업용 아라비카는 다소 섬세하고 매우 균일하며 자가수정이 가능한 나무이며, 재배 시 매우 적은 양의 자연교배 (natural crossing)와 가까운 친족끼리만 교배되며 여러 세대를 거친다. 다행히도 이는 상당한 범위의 조건들에 반응한다. 그러나 약점이 있다. 특정 질병과 해충에 매우 취약하며, 생리학적으로 쉽게 불균형을 이룬다. 일부 조건에서는 매우 성공적이다.
모든 적응력과 함께, 사실상 자가수정 습성은 경이로운 동일성 측면에서 거의 복제품과 같다. 커피 재배자가 관찰한 자가 자손에서 나온 수십억 개의 묘목에서 품종 보존을 받을 만한 일부 돌연변이들이 발생한 것으로 나타났다. 아라비카 농장이 더욱 집약적이고 현대적인 농업 기업으로 발전함에 따라, 농업 방식의 변화와 질병 및 곤충 종류의 변화로 인해 지속적인 손실이 발생한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이는 다른 커피 종의 도입을 의미했다. 원래의 아라비카 나무는 모든 고귀한 조상을 위해 수세기에 걸쳐 더욱 풍성하고 다양한 종과 계통으로 대체되고 있다. 몇몇 박물관 재배지와 에티오피아 커피 숲에 여전히 존재하는 매우 다양한 아라비카 재료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한 이러한 현상은 더욱 빠르게 계속될 것이다. 이 종의 실제 야생 범위는 아직 식물학적으로 완전히 조사되지 않았으며 원예학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다른 종과 비교하여 진지한 연구가 필요하다.
'Coffee Histo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프랑스 동인도회사와 부르봉 섬 (1) | 2024.05.23 |
---|---|
커피발견의 전설들 (0) | 2023.04.2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