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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azil Coffee

브라질 커피 역사

by mjcafe 2023. 4. 9.

HISTORY OF COFFEE IN BRAZIL

Francisco de Melo Palheta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1727년 원사(소령, Sergeant Major) 프란시스코 데 멜로 팔레타(Francisco de Melo Palheta)(1670-1750)는 프랑스령 기아나(French Guiana)와 네덜란드령 기아나(Dutch Guiana, 현재의 수리남) 사이의 영토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발아가능 커피의 판매 금지

 

당시 브라질 국경 문제에서 논란이 된 지점 중 하나는 브라질 북부에 있는 Capitania do Maranhão e Grão Pará (마라냥- 그랑파라 까삐따냐)라는 포르투갈 식민지의 한 구역과 프랑스령 기아나(Guiana Francesa) 사이의 국경 지역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1722년 7월 19일 주앙 다 마이아 다 가마(João da Maia da Gama) 대장이 그 지역의 정부를 인수했을 때 그의 첫 번째 조치 중 하나는 그 지역에서 일어나고 있던 프랑스의 공격에 맞서 싸우는 것이었다. 1723년부터 1728년까지 해안을 순찰하는 일상적인 경비 원정에 더해 이 주지사는 이 지역으로 4번의 대규모 군사 원정을 명령했다.
   그들 중 한 명은 프란시스코 데 멜로 팔헤타(Francisco de Melo Palheta)이었는데, 그는 이웃 프랑스령 기아나의 오이아포크 강(Oiapoque River) 주변의 경계 문제를 조사하는 공식 임무를 특히 담당했다. 그곳에서 총독 Claude D'Orvilliers는 두 식민지 사이의 경계에 포르투갈 방패를 심어 패턴을 제거하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포르투갈 장교의 임무는 1713년 4월 11일 위트레흐트 조약에 따라 포르투갈과 프랑스 사이의 국경을 존중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부대장의 또 다른 분명한 임무는 1719년부터 가이아나에서 성공적으로 재배되고 이미 시장에서 유리한 것으로 인식된 커피 묘목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프랑스 소유의 브라질 북부에서는 생산 통제가 엄중했다. 엄격한 검열를 통해 농산물이 곡물을 발아시키는 막인 파취먼트와 함께 떠나는 것을 금지했다. 

   다양한 방편을 통해 그 포르투갈 왕실 관리는 두 가지 작업을 모두 수행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프랑스 정부의 공식적인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두 영토 사이에 미리 설정된 구분선을 존중하기 시작했고 커피 종자와 묘목은 결국 브라질로 운송되었다.

 

브라질에 커피를 소개한 Francisco de Melo Palheta를 이상적으로 표현한 그림. 카이엔에 있는 프랑스 상인에게서 구입한 귀족 의상(망토, 꼭 맞는 겹옷, 진홍색 천 바지, 자수 모자)을 입고 총독 앞에 나간다.

 

Cherchez la femme (여자를 찾아라)

 

브라질 커피 도입에 관한 대부분의 기록은 카옌 총독의 아내인 도르빌리에 부인의 중재를 언급한다. 뿐만 아니라 황홀한 숭고한 여성상을 구애하는 팔헤타의 의협적인 포즈를 재현해 일러스트가 흉내내려 했던 당시의 '로맨틱한 분위기'를 에피소드에 부여한다. 이 정보는 왕에게 보낸 공식 청원서(문서의 내용에 부적절함)에서 찾을 수 없지만, 현대 연대기 및 일반 문헌에서 커피를 암시하는 것으로 취급된다. 방문객에게 커피 씨앗을 넘겨주는 그 마담의 다정한 몸짓과 친절을 반복적으로 언급해오고 있다. 

   Madame D' Orvilliers의 이름은 1763년의 문서에 나타나 있는데, 당시 파라의 옛 농부들 사이에 커피가 도입된 기억이 여전히 살아 있었다. 국경의 군사 정찰 임무가 끝난 후 Palheta는 Cayenne으로 가서 D' Orvilliers 주지사가 경계 표시를 인증하는 데 제공한 다양한 배려와 예의에 대해 감사를 표현했다. 

  그는 그 권위에 더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 수도에 있는 프랑스 상인으로부터 당시 최고의 귀족 복장인 망토, 꽉 끼는 겹옷, 진홍색 천 바지, 수 놓은 모자 등 새 복장을 구입했다. 그리하여 그는 우아하게 차려입고 궁전을 방문하여 주지사의 부인인 마담 도르빌리에를 만났고, 그녀와 함께 난생처음 커피 한 잔, 흥미진진한 감각의 묘약을 경험했다. 그 경험은 그에게 이렇게 맛있는 음료를 추출하는 식물이 그의 땅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한탄하면서 "열정적인 찬양"으로 가득 찼다. 

    그 다음, 설명에 따르면, 그들은 모두 커피 농장을 산책하러 나갔고, 여주인은 미소 짓는 남편을 보면서 Palheta에게 친절하게  벨렘으로 돌아왔을 때 맛있는 음료와 함께 경험했던 기쁨을 새롭게 할 수 있도록 "외투 주머니에 커피 원두를 넣은 사람과 같은 용감함을 행하도록 커피 한 줌을" 제안했다. 

  이야기의 끝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Palheta는 훨씬 더 많은 양의 종자뿐만 아니라 Coffea arabica의 5개 나무를 가지고 브라질로 돌아왔다. "태어날 수 있는 커피의 판매"에 대한 명시적인 금지에도 불구하고, Madame D'Orvilliers의 중재는 코트 주머니에 넣은 한 줌의 씨앗보다 훨씬 더 관대했을 것이라고 여겨지고 있다. 

Madame D’Orvillier와 Francisco de Melo Palheta   "fidalgo" Palheta가 묘목이나 커피 씨앗을 얻기 위해 했을 구애를 했을 것이라는 구전 이야기.


   1722년에서 1723년 사이에 팔레타는 마데이라 강을 탐험하는 중요한 원정대를 이끌었고 두각을 나타낸 브라질 출신의 식민지 군대의 원사이자 해안 경비대 중위 계급을 가지고 있었던 육군 및 해군 장교였다.

   그는 엄격히 지키는 인기 있는 커피 나무를 밀수하기 위해 카옌(Cayenne, 현재 French Guiana의 수도)에 도착했다. 카옌의 총독 부인마담 도르비리에(Madame D’Orvilliers)를 바라보며 그는 계획을 세웠으며, 자신의 귀국 전에 열린 연회에서 애정 얘기가 먹히면서, 그녀는 브라질 커피 산업의 시초가 되는 묘목이 든 꽃다발을 그에게 건네주었다. 프랑스령 기아나 총독 클로드 길루에 도르빌리에(Claude Guillouet d’Orvilliers)의 아내인 마담 도르빌리에(Madame d'Orvilliers) (마리 클로드 드 비크 드 퐁지보(Marie-Claude de Vicq de Pontgibaud))가 팔레타의 주머니에 커피 씨앗을 넣었을 것이라는 기발하고 잘 알려진 이야기도 있다.

    이 교환에 대한 애정적 동기론은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기록에 따르면, 팔레타는 1727년 2월 북동 브라질의 마라냐-그랑파라(Maranhão e Grão-Pará) 주지사 João da Maia Gama에 의해 포루투갈과 프랑스 간의 영토분쟁을 해결을 위해 국경 임무 책임자로 임명되어 프랑스령 기아나로 파견되었다. 주지사는 커피의 경제적 감재력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을 것이며, 국내 재배를 시작하기 위해 씨앗을 구해오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당시 프랑스인들은 발아가능한 커피 종자를 판매하지 못하도록 금지하고 있었고, 브라질인과 포루투갈인은 프랑스와 거래하는 것이 금지되고 있었다.

A Semente do Ouro Negro _ Francisco de Mello Palheta

    팔레타는 1733년에 포루투갈 왕 João V세에게 편지(청원서)를 쓴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는 그 편지에서 1,000개 이상의 씨앗과 4개의 커피 묘목을 얻었다고 말했지만, 자세한 방법은 밝히지 않았다. 원정대가 돌아오자마자 씨앗은 Belém do Pará의 농부들에게 분배되어 브라질 커피 재배가 시작되었다.

 

Pará의 유력자 Francisco de Melo Palheta 소령


Francisco de Melo Palheta는 아마도 1670년에 파라(Pará)에 있는 Belém 시에서 포르투갈 군대 보병 대장인 João Rodrigues Palheta와 Maria da Ressurreição de Bittencourt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전해진다. 따라서 그는 식민지에서 태어난 포르투갈인의 자녀들인 백인에게 붙여진 이름인 "마좀바(mazomba)"였다.

   브라질에서 자란 그는 군사 경력을 쌓았고 Maranhão 주의 정규군에 입대했으며 Maranhão, Pará 및 Ceará의 장교를 역임했다. 나중에 그는 당시 사회에서 높이 평가되는 계급인 중사 계급을 얻었고, 그 땅에서 가장 전통적인 성을 가진 Bernarda de Mendonça Furtado와 결혼했다. 

   1727년 프랑스령 기아나 원정대를 지휘하는 해안경비대 중위의 직책을 맡게 된 그는 해군 계급을 선택하여 더 많은 월급을 받았다. "Capitania do Pará의 주요 인물 중 한 명"으로 간주되는 그는 1709년에 약 39세의 나이로 첫 번째 땅(sesmaria)를 얻었고 이미 고령인 1731년에 두 번째 세마리아를 얻은 지주이자 위대한 소유주였다.
   그는 다섯 명의 자녀를 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죽음 연도는 알 수 없으며, 적어도 1733년까지 아마도 약 63세까지 살았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전기 작가들은 주지사가 임명한 임무에 주로 집중한다. 1722-1723년에 그는 "깃발로 무장"하고 갤리선(galera) 1척, 갈리우타(galeotas, 범요양용선, 돛을 달 수도 있고 노를 저어갈 수도 있는 배) 3척, 카누(canoa) 1척으로 구성된 대규모 측근과 함께 벨렘을 떠나 은광이 포루투갈인들의 탐욕에 불을 붙인 페루와 파라 사이의 통신을 용이하게 할 새로운 강 경로를 찾았다. 

   이 서사의 설명은 Palheta에게 황량한 영토에 걸쳐 활약하는 정복자의 소질을 제공하고 있는데, 지나갈 수 없는 폭포를 극복하고, 돌 절벽을 우회하기 위해 육지로 길을 열고, "도마뱀, 카멜레온 및 카피바라의 고기"만 먹는다고 말하고 있다. 

   1727년 원정에서 그는 9척의 피로가(pirogas, 돛대 둘 있는 평저선)와 200명 이상의 병력과 함께 벨렘을 떠났다. 그는 포르투갈 영토와 프랑스령 기아나 사이의 국경을 보장하는 것 외에도, 탐내는 커피 씨앗과 묘목을 얻었다. 1734년 D. João V 왕에게 보낸 편지(청원서)에서 자신의 섭리를 3인칭으로 표현한 사람은 바로 Palheta 자신이다. 

 

    18세기 내내, 커피는 지역적인 작물 이상으로 여겨지지는 않았지만, 북동 브라질에서 커피 생산량은 증가했다. 1727년 이후 처음 10년 동안은 그 영향이 미미했다. 커피 재배는 Maranhão와 Grão-Pará 주 전역에 빠르게 퍼졌지만 경제적으로 큰 중요성을 얻지는 못했다. 포르투갈 왕실은 커피 수출에 대한 세금 면제와 같은 일부 인센티브도 부여했지만 재배는 성공하지 못했다. 18세기 말에 브라질은 국제 커피 시장에서 여전히 관련성이 거의 없었다. 상황은 1808년 포르투갈 왕실이 이 나라에 도착한 후에야 바뀌기 시작했다. 

  브라질로 커피를 도입한 팔레타의 이름과 업적은 거의 200년 동안 잊혀졌다. 파라에서 커피 재배가 시작된 지 수십 년 후, 그 지역을 여행한 한 주교는 사람들이 그에게 최초의 커피 씨앗을 가져온 사람의 전체 이름은 모른다고 썼다. 그들은 그의 성이 Palheta라는 것만 알고 있었다. 19세기에 출판된 커피에 관한 많은 국내 책에는 그 군인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지 않다고 한다. 일부 고대 역사가들은 그가 꼭두서니과 식물을 브라질에 도입한 사람이라고 정확하게 식별할 수 있었지만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20세기 초, 특히 1927년에 이 문서에 제시된 많은 정보가 발견되고 전파되었다. Palheta의 명성은 최근의 일이다.

 

커피 면세 (Café isento de imposto)

 

처음 소개된 종자와 식물은 파리의 Jardin des Plantes에서 재배된 식물의 표본인 Coffea arabica과에서 나왔다. Palheta는 그들 중 일부와 함께 Pará에 천 그루 이상의 나무가 있는 커피 농장을 세웠고, 이를 위해 그는 정부에 100쌍의 노예를 요청했다. 1734년에 발행된 왕실 헌장에는 브라질 땅에 종자와 식물을 체계적으로 심기 시작하면서 농업 투자로 종자와 식물을 가져오는 이니셔티브의 개척 정신이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그는 브라질 최초의 커피 재배자였다.

   Maranhão에서 곡물은 합리적으로 순응하여 Maranhão의 커피만이 그의 왕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결정한 João V의 법령에 의해 보호되는 포르투갈로 배송될 수 있었다. 이것은 브라질에서 "그린 골드"의 엄청난 경제적 모험의 초기 시작이었다.
   1731년에 브라질에서 리스본으로 커피가 처음으로 수출되었다는 소식이 있다. Gazeta de Lisboa는 "레반트에서 온 것보다 더 맛있는 작고 붉은 과일" 7파운드(3,213g)를 보도했다. 그래서 재배를 장려하기 위해 12년 동안 면세 혜택을 받았다. 그러나 그런 정도의 인센티브만으로는 농부들이 재배에 막대한 투자를 하도록 동원할 수 없었다. 다른 오지 약은 더 매력적이고 수익성이 좋았으며 결국 대영제국에 항복한 대도시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금이었다. 최의 식민지 수입을 흡수했다.

   따라서 18세기의 상당 기간 동안 커피 재배의 확산은 소규모 농장의 제한된 생산으로 인해 국가의 북부와 북동부로 제한되었다. 토양은 가장 적합하지 않았고, 특히 아마존의 토양은 브라질에 들어온 표본에 적합하지 않았다. Rio Grande do Norte, Piauí 및 Sergipe는 거의 재배를 무시했다. 일부 실험은 Ceará (1747), Alagoas (1773), Goiás (1774),  Pernambuco 및 Paraíba에서 이루어졌지만 거의 표현이 없었다. 바이아에서는 1778년부터 Caravelas에서 시작하여 조심스러운 상업적 생산이 개발되었지만 Ilhéus가 가장 눈에 띄는 지역으로 커피 작물이 코코아 작물과 함께 시도되었다. 1798년에 바이아에서 254포의 커피가 수출되었는데, 이는 왕국으로 보내진 다른 제품과는 거리가 멀었다.

 

   희박한 작물에도 불구하고 겸손하게 재배된 커피나무는 경제적 잠재력을 지닌 식물로서의 매력을 유지했으며 자극적이고 약용적인 특성을 지녔으며 정원을 장식하는 장식품으로 여겨졌으나 그 유명한 특성으로 탐나기도 했다. 농장과 뒷마당에 심어 국내 소비를 허용하여 마시는 습관을 선호했다. 그때까지 이 산물은 일반화되지 않았다. 그것은 이국적인 약의 속성, 우아한 테이블을 위한 사치품과 함께 희귀한 경작의 세련된 선물로 제공되었다. 세련된 음료로서 커피는 같은 18세기 포르투갈에서도 소비되었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초콜릿과 차에 대한 선호도가 떨어졌고 둘 다 궁정에 매우 많이 제공되었다. 아침 식사에서 차는 필수였고, 점심에는 초콜릿을 자주 마셨다. 소개된 이후 커피는 사교성의 상징이 되었다. 이것은 "저녁 9시에 Sintra, Visconde de Mesquitela의 집에서 아이스크림 후 제공되는 Chá ô Fé"에서 언급했듯이 차와 관련된 왕국의 궁전 테이블에 들어갔다. 또는 다른 소식통에 따르면 "과자와 물 후에 Elvas [...]에서는 오히려 나쁜 차와 커피이다." 포르투갈 역사가들은 그 당시 커피가 점심과 간식에 관련된 차와 초콜릿과 달리 식사가 끝날 무렵 마시는 것처럼 보였다고 결론지었다.
   1730년경 팔헤타(Palheta)의 커피 농장에서 제품이 성장하여 무역 수지에서 1위를 차지할 때까지, 100년 후인 1830년에 식물은 점차 확산되어 남쪽으로 여행을 시작했다. Minas Gerais, Espírito Santo, Rio de Janeiro, São Paulo 및 Santa Catarina는 적당한 커피 작물이 보고된 지역으로, 더 큰 경제적 중요성을 부여하기는 커녕 단지 테스트용으로만 영토 전체에 흩어져 있는 다른 작물과 번갈아 가며 재배되었다.

 

Source : William O. Blake, The History of Slavery and the Slave Trade (Columbus, Ohio, 1857), p. 288

커피의 땅이 된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Rio de Janeiro) 주에서 최초의 커피 농장이 1770년에 설립되었으며 곧 유럽으로의 소규모 수출 무역이 발전되었다. 1774년 João Alberto Castelo Branco 판사가 커피 나무 2그루를 Maranhão로부터 가져왔는데, 이들은 Barbadines의 수도원에서 키워졌고, 이것이 Rio de Janeiro, Minas Geraes, 그리고 São Paulo 주의 큰 농장들의 선조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커피 생산이 브라질에서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은 1800년대 이후였다. 1800년에는 커피 수출량이 1,720 pounds였으며 1820년에는 12,896,000 pounds로 증가했다. 1840년에는 이 수치가 137,300,000으로 증가했으며, 세기 말에는 브라질이 매년 10억 pounds 이상의 커피를 수출하게 되었다.

  리우데자네이루(Rio de Janeiro) 주 바이샤다 플루미넨세(Baixada Fluminese) 지역에서의 커피 생산이 발레도 파라이바(Vale do Paraíba)로 확장되기 시작했고, 남쪽과 서쪽으로 미나스 제라이스(Minas Gerais) 주, 그리고 상파울루(São Paulo) 주로 이동했다. 1800년대 말까지, 상파울루(São Paulo)가 브라질 커피 중심지였다. 생산이 파라이바 계곡(Vale do Paraíba)의 고갈된 토양에서 캄피나스(Campinas), 리오 클라로(Rio Claro) 및 준디아이(Jundiai) 주변의 더 비옥한 토양, 더 나은 기후 및 평평한 지형으로 이동함에 따라 그렇게 되었다.

  생산 증가는 주로 노예 노동력에 의해 크게 뒷받침되었는데, 500만명 이상의 아프리카 노예들이 브라질로 왔던 것으로 추정되고, 이는 그 새로운 대륙으로 수입된 노예의 절반이 넘는 규모였다 (Adams, 1925).

  브라질에서 아프리카 노예제도는 16세기부터 존재하였지만, 설탕 및 금, 다이아몬드 채굴의 확장으로 17세기에 크게 확대되었다. 1826년 영-브라질 조약(British-Brazilian Treaty)이 서명되어 1830년까지 노예제도를 종식하려 했지만, 직접 노예 무역에서 이익을 얻는 사람들과 정부의 강제 집행 능력 부족으로 인해 이러한 제도는 종식되기까지 50년 이상이 걸렸다. 1800년부터 1850년까지 브라질의 농업 및 커피 붐은 200만 명 이상의 아프리카 노예를 흡수했다.

 

Source : Immigration to Brazil - Wikipedia

브라질로의 커피 이민

커피가 상파울루(São Paulo)에서 서쪽으로 이동함에 따라, 재배자들은 노동 인력에 대한 "perfect storm"의 어려움에 직면하였다. 생산성 증가로 인한 노동력 수요 증가, 노예 노동력의 부족으로 노예 시장 가격 상승, 그리고 노예 제도에 대한 반감이 커지는 등의 이유가 있었다. 브라질은 공식적으로 1888년에 노예제를 폐지하기 전에 이미 이러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으며, 이는 1845년 영국에서 제정된 애버딘법(Aberdeen Act)과 같은 조치들 덕분이었다. 이 법은 영국 왕국에 의해 의심스러운 브라질 선박을 검색하고 노예 상인을 체포할 권한을 부여하여 직접적으로 노동력 비용을 높이고 노예 노동력 공급을 줄였다. 1871년에 제정된 자유 출생법(Law of Free Birth)(Rio Branco Law라고도 알려졌던 법)은 노예들의 모든 신생아와 그 주와 왕가에 속한 노예에게 자유를 부여했다. 아이의 노예 부모를 소유한 주인들은 아이들을 21세가 될 때까지 돌보고, 그 후에 국가에게 금전적 보상을 받고 넘겨주어야 했다.

Nicolau Vergueiro
Thomas Davatz

  브라질에서 노예제도는 1888년 5월 13일에 제정된 Golden Law, 또는 레이 아우레아(Lei Aurea)로 폐지되었다. 이는 계속 늘어나는 커피 농장들에게 노동력을 공급하기 위한 이민 정책을 실시하는 것으로 빨리 이어졌다. 브라질은 그 보다 20년 전에 상파울루(São Paulo) 주의 Fazenda Ibicada에서 커피 농장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력을 수입하는 실험을 처음으로 시도했었다. 1847년부터 1857년까지 농장주이자 상원의원인 니콜라우 베르게이로(Nicolau Vergueiro)는 주로 스위스-독일인 가족 180가구를 자신의 농장에서 일하도록 고용했다. 그러나 그의 실험은 반란과 실패로 끝났다. 왜냐하면 노예를 다루는 것이 익숙한 농장 관리자들은 권리와 그에 따른 기대를 가진 시민들을 다루는 것을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베르게이로가 이민자들에게 부과한 계약 의무는 공정하지 않았다. 그는 그들의 브라질로의 수송과 정착에 대한 비용을 청구하고 이에 대한 상당한 이자를 부과하여 사실상 노예 계약으로 이어졌다. 이 상황은 그들이 약속받은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으며, 상황을 목격한 이민자 스위스 교사 토마스 다바츠(Thomas Davatz, 1815-1888)의 지도하에 이민 가족들은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스위스는 브라질로의 이민을 중지하게 되었으며, 브라질 제국은 이후 외국인 노동자들의 근로 조건 및 수입 규제에 대한 입법을 재고했다.

 

 

 

 

 

 

 

 

 

 

 

과잉생산

시간이 지나 커피 생산은 수요를 능가하게 되어 가격이 하락하기 시작했다. 브라질의 뉴 리퍼블릭 정부(돔 페드로 2세 군주(Dom Pedro II's monarch)의 평화적인 쿠데타 이후)는 처음에는 더 많은 돈을 인쇄하여 대응했지만, 이는 높은 인플레이션과 통화 가치의 대폭적 하락을 초래했다. 이는 외화로 돈을 받는 강력한 커피 재배자들에게는 기쁨을 줬지만, 국내 시장에는 혼란을 불러일으키고 브라질이 외국채무를 상환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다.

1888년부터 1895년까지 뉴욕 시장에서 14센트에서 18센트 사이를 오가던 커피 가격은 1896년에 풍년으로 인해 10센트로 하락하였고, 1901년에는 1파운드당 커피 가격이 6센트로 떨어졌다. 제1차 커피 생산 및 소비 연구 국제회의(International Congress for the Study of the Production and Consumption of Coffee)에서 가격 안정을 위한 국제적 시도가 실패한 후, 브라질은 혼자 나서기로 결정했다. 1906년, 브라질의 3대 커피 재배 주들인 상파울로, 리우데자네이루, 미나스제라이스의 대표들은 정부가 잉여 커피를 매입하여 시장에서 빼내고 높은 가격을 유지할 수 있는 가격안정책(valorization scheme)을 세우는 협약에 서명하였다. 그 가격안정책은 커피 가격의 자유 낙하를 성공적으로 억제했지만, 재배자들은 이제 가격 바닥에 이르면서 생산을 줄이지 않았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브라질의 세계 커피 생산 독점이 감소함에 따라, 다른 생산 국가들에게 가격안정책을 국제화하는 것이 필요해졌다. 이는 인터 아메리칸 커피 협정(Inter-American Coffee Agreement)에 의해 이뤄졌으며, 이는 나중에 국제 커피 협정(International Coffee Agreement)이 되었다. 국제 커피 협정은 국제 커피 기구( International Coffee Organization)에서 운영되었으며, 미국이 지원을 철회한 1989년까지 유지되었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커피 가격은 상당히 하락하였다.

 

브라질에서의 스페셜티 커피

1990년대에는 이미 세계 최대 커피 생산국이었던 브라질이 세계 최고의 커피 생산국 중 하나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하는 운동이 시작되었다. ICA 할당 체제는 국가가 커피를 구매하도록 설정하였고, 이후 시장 시스템도 고품질 생산에 대한 보상이 적었다. 반면, 미국에서 시작된 스페셜티 커피 운동(Specialty Coffee movement)은 세력을 확대하고, 품질 중시 소비자들은 이제 생산자들의 노력에 대한 보상을 기꺼이 하기 시작했다.

  브라질 스페셜티 커피 협회(Brazilian Specialty Coffee Association (BSCA))가 결성되었고, 현재는 세계 최고의 커피 품질 경쟁대회인 컵 오브 엑셀런스(Cup of Excellence)가 BSCA와 기타 단체들에 의해 1998년에 개최되었다. 컵 오브 엑셀런스와 같은 대회를 통해, 피아타(Piata), 아라퐁가(Araponga), 발리 그램마(Vale da Grama), 피라주(Piraju), 카르모 데 미나스(Carmo de Minas)와 같은 다양한 지역들은 세계적 수준의 커피를 생산할 수 있는 독특한 미기후(micro-climates)를 갖춘 지역으로 자리 잡았다.

  브라질 커피의 품질은 계속해서 향상되어, 한 세대 동안 많은 브라질 커피 농장들은 그들의 세계 최상급 커피의 생산으로 유명해지면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Chronology

1820:  그 10년 이후로 브라질은 Vale do Paraíba (상파울로), Araxá(미나스제라이스) 및 Goiás에서 지속적으로 수출하면서 커피 생산국으로 간주되었다.
1845:  브라질이 전 세계 커피의 45%를 생산한다.
1847: 독일인, 스위스인, 포르투갈인, 벨기에인의 브라질 이민.
1848: 유럽 이민자들의 도착은 유럽에서 여러 정치적 위기와 혁명이 발생한 1848년부터 증가. 처음 설치된 파트너십 시스템에서 식민지 주민은 자신이 경작한 토지의 생산 가치의 절반을 받을 자격이 있었고 농부에게 여행 및 설치 비용을 지불해야 했다. 농부는 식민지 주민에게 가장 비생산적인 농장을 주었고 그들은 생산물을 공유할 때 속았다. 이러한 이유로 파트너십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았다. 많은 정착민들이 농장을 버렸다.
1850:  1850년에서 1889년 사이에 871,918명의 이민자들이 브라질에 입국, 대다수는 상파울루의 커피 농장으로 향했다. 그들은 이탈리아인, 포르투갈인, 스페인인, 러시아인, 오스트리아인, 루마니아인, 폴란드인, 독일인, 일본인이었다.
1857: "bicho mineiro(Coffee Leaf Miner)"의 공격과 노예 노동력 제한(Eusébio de Queiroz 법)으로 인한 브라질 커피 공급의 감소와 유럽경제의 회복으로 국제 커피 가격이 상승했다. 가격은 50% 상승하여 이후 몇 년 동안 생산이 크게 확대되었다.
1865: 남북전쟁에 직면한 미국에 대한 브라질 커피 수출 감소로 가격이 하락했다.
1870: 1870년부터 상파울루 주 정부는 유럽 이민자들의 브라질행 수송에 보조금을 지급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제국 정부로부터 이민 보조금을 지원 받았다. 급여가 우세하기 시작했다.
1906:  시장은 수확 비용을 간신히 감당할 수 있는 낮은 가격에 동기를 부여받은 최초의 주요 정부 개입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재고량은 1902년에 이미 많았고 1906년에는 약 1,700만 자루(saca)의 대규모 수확이 예상되었는데, 세계 소비량이 2천만 자루에 불과했을 때 가격이 하락했다. 개입은 1906년 2월 26일 상파울루와 미나스 제라이스의 통치자가 "Convênio de Taubaté"에 서명했을 때 이루어졌다. 커피의 최저 가격이 고정되었고 새로운 작물의 재배가 금지되었다.
1910: 표준화된 커핑 평가 시스템이 창고와 항구에서 사용되었음.
1917: Santos Official Coffee Stock Exchange (산토스 공식커피거래소), 원두를 커핑하여 등급평가를 시작. 
1918:  대규모 서리로 브라질 생산이 감소하여 가격이 상승했다.
1932:  초과생산으로 인한 재고 소진. 3,350만 자루의 재고가 쌓여 1944년까지 7800만 자루가 소각되었다.
새로운 커피 농장의 금지.
1939-1945: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국제 커피 가격이 하락.
1945-54:  전쟁 후 향상된 가격으로 새로운 플랜테이션이 장려되었다.
1949: 브라질 정부는 커피 등급에 대한 최초의 전국적 규정을 발표. 
1955:  2200만 자루의 과잉 생산.
1962-1967: 20억 그루의 커피나무 제거. 1964년 재고 보유량이 4800만 자루에 이르러 매우 낮아진 가격을 높이기 위한 시도가 있었다.
1969:  파라나 주에서는 80%의 수확량이 파괴되는 서리가 발생하여 가격이 상승.
1970: 연방 정부가 커피 농지 개혁 계획을 발표. 풍부한 자금 지원을 제공하여 중남부 지역(상파울루 남부, 미나스제라이스 삼각 지역 및 알토 파라나이바)의 커피 생산을 촉진한다.
1977: 1975년의 서리로 인해 남부 지역에서 커피 생산이 감소하여 가격이 높아졌다. 1970년 브라질에 도입된 "오렌지색 커피 녹병"의 발병. 이때 커피 가격은 역사상 가장 높았으며 자루 당 400 달러 정도였다.
1986: 장기간의 가뭄과 중남부 지역의 커피 나무 고갈로 인해 가격이 급격히 상승했다. 가격 상승으로 인해 국제 커피 협정 조항이 작동하지 않게 되었다. 해외에서 자유 시장이 운영되기 시작하여 상승 후 급락한다.
1987: 커피 국제 협약 갱신되며 가격이 낮아졌지만 안정세가 유지되었다(1~1.4달러/파운드).
1989:  커피 국제 협약 종료.
1991-1993:  매우 낮은 가격 기간, 일부 기간에는 40달러 미만. 중남부 브라질의 농지가 크게 파괴되었고, 많은 농지가 버려졌다.
1994:  브라질에서 큰 양의 생산지가 강한 서리로 영향을 받았다. 거의 전체 파라나 주, 상파울루 주의 대부분 및 미나스제라이스 남부 지역이 심각하게 영향을 받았다. 서리 이후 긴 가뭄으로 인해 농지 복원이 더욱 늦어졌다. 가격은 높은 기록을 세워 최대 200달러/자루에 이르렀다.
1995:  브라질 생산량이 크게 감소(약 1,200만 자루)하여 가격이 약간 하락하고 국제 구매자가 최소한의 재고로 운영하기 때문에 150-180달러/자루 사이에서 안정된다.
1996:  연방 정부가 결성한 커피 정책심의위원회(CDPC)가 설립되었으며, 정부 6명과 민간단체 6명으로 구성된다:
CNC (02), CNA (01), FEBEC (01), ABIC (01) 및 ABICS (01).
2001:  커피 가격이 역사상 가장 낮은 35달러/자루에 달한다.
2002: 브라질 연방정부, 브라질 공식 분류(Classificação Oficial Brasileira 또는 COB)에 대한 프로코콜 공식화.
2011: 2010년과 2011년 사이에 커피 가격이 2배 이상 상승하여 2011년 3월에 30년 이상의 최고 기록인 350달러/자루에 이르렀다. 이 가격 상승은 소비국의 급격한 재고 감소와 콜롬비아와 같은 일부 주요 생산국의 생산 문제 때문이다. 격년생산으로 2011년이 브라질 수확량이 적은 해(off-year)라는 사실이 가격 상승에 도움이 되었다.

References

1. Hiram Reis e Silva, Porto Alegre, RS, 21 de julho de 2013, "Francisco de Mello Palheta".
    https://www.gentedeopiniao.com.br/colunista/hiram-reis-e-silva/francisco-de-mello-palheta 

 

Francisco de Mello Palheta

Hiram Reis e Silva, Porto Alegre, RS, 21 de julho de 2013. O jornal “A Tribuna”, de Santos, São Paulo, na sua edição especial de 26 de janeiro de 1939, comemorativa do centenário da elevação de Santos à categoria de cidade, publicou interessante

www.gentedeopiniao.com.br

2.  Hiram Reis e Silva, "A Terceira Margem – Parte XL - “BANDEIRA” de Francisco de Mello Palheta – I", 

     Quarta-feira, 9 de setembro de 2020 - 11h19. 

     https://www.gentedeopiniao.com.br/colunista/hiram-reis-e-silva/a-terceira-margem-parte-xl-bandeira-de-francisco-de-mello-palheta-i

 

3. Eduardo Cesar, "Francisco Palheta: entre fatos e lendas", Peabirus - Coffee Social Network, 28/06/2006. 

    http://www.redepeabirus.com.br/redes/form/post?topico_id=76282 

 

4. Andrew Amelinckx, "Old Time Farm Crime: The Coffee Spies of the 1700s", Modern Farmer, AUG 19, 2013. 

 

5. Brown University Library, "Immigration | Brazil: Five Centuries of Change". 
    https://library.brown.edu/create/fivecenturiesofchange/chapters/chapter-4/immigration/

 

Immigration | Brazil: Five Centuries of Change

After abolition, rich planters looked to recruit European immigrants to rebuild the Brazilian labor force. It was thought that European immigrants would “improve” the “ethnic shock.” Large influx of Japanese people immigrated to Brazil at the turn

library.brown.edu

 

6. Shari Wejsa and Jeffrey Lesser, "Migration in Brazil: The Making of a Multicultural Society",
    (Washington, DC: Migration Policy Institute, MARCH 29, 2018). 
    https://www.migrationpolicy.org/article/migration-brazil-making-multicultural-society

 

7. Carlos Barreto. A Semente do Ouro Negro - Docudrama (Completo).

    https://www.youtube.com/watch?v=reumYk5-u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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