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식 명칭 | Republic of Kenya 케냐공화국 |
Jamhuri Ya Kenya (스와힐리어) |
수도 | 나이로비 Nairobi | 인구 439.7만명. 고도 해발 1,700m |
행정구역 | 47개의 반-자치 현(county, kaunti -스와힐리어)으로 구성. 2013년 이전에는 8개 주로 구성. County ⇒ Sub-counties (295개) ⇒ locations (2427개) ⇒ sublocations (6612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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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 통용어(국민어) ⇒ 스와힐리(Swahili)語 | 공용어 ⇒ 영어, 스와힐리語 |
면적 | 582,646 ㎢ (세계 46위, 한반도 2.6배) | |
국경 | 에티오피아, 남수단(북쪽), 소말리아(북동쪽), 우간다(서쪽), 탄자니아(남쪽) | |
지형 | 인도양 해변측 ⇒ 낮은 평지, 내륙 ⇒ 고지대 산맥과 고원, 내륙 고지대 ⇒ 거대 단층계곡에 의해 양분, 서쪽-비옥한 고원(아프리카에서 가장 성공적인 농업지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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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 | 해안 ⇒ 무더운 열대성 기후, 고원지방 및 서부 ⇒강우 풍부 북부 ⇒ 건조기후. 킬리만자로산 일대-서늘 |
2~3월⇒ 기온 최고 7~8월 ⇒ 기온최저, 일교차 심함. 연평균 기온 ⇒ 16℃ |
경제 | 서비스업(64.6%), 농업(25%), 제조업(11%). 농업과 관광업에 주로 의존. 동아프리카에서 무역과 금융의 중심지. 시장경제체제, 서방자본유치, 주요 산업은 의류산업. GDP per capita (2021년) = 2,236 달러(US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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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 | 실링(Kenyan Shilling, sh, KSh). 1 KSh = 100 Cent. 환율 US$1=120Ksh('22.9.1.) |
동전 → 1, 5, 10, 20 실링 4종 은행권 → 50, 100, 200, 500, 1000실링 |
인구 | 5,402만 7000명 (세계 27위) | 인구밀도: 93.09명/㎢ |
민족(부족) | 키쿠유족(Kikuyu, 17.15), 루햐족(Luhya, 13.83), 칼렌진족(Kalenjin, 12.87), 루오족(10.48), 캄바족(Kamba, 10.08), 소말리족(6.18), 키시족(Kisii, 5.71), 미지켄다족(5.08), 메루족(Meru, 4.29), 기타 (10.98) (각기 다른 언어 사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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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 개신교(47.66), 카톨릭(23.46), 이슬람교(11.21), 기타 (11.87) | |
건국 | 1963년 12월 12일 (영국으로부터 독립, 영연방 정회원국) | |
정치 | 대통령 중심제(국가원수=대통령), 5년 임기, 직선제, 전체 유효투표의 과반+47개 카운티 절반 이상에서 최소 25%.이상 득표해야. 현재 대통령(5대) → William Samoei Ruto (2022년 9월 13일 취임) https://www.president.go.ke/ 의회 구성 = 양원제(하원 350석, 상원 68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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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 | 200 volts, 50 Hz | 4각 3구 플러그 |
인터넷 도메인 | .ke | |
전화 | Country code는 254. | |
시간대 | Africa/Nairobi. UTC/GMT + 3시간 |
Geographical setting
- 케냐는 인도양에 접해 있는 아프리카 동부 해안의 적도에 걸쳐 있다.
- 대륙 기준으로 보면 중간 크기의 국가로 면적은 약 582,464 ㎢ 이다.
세계 48위의 면적이며, 한반도의 2.6배정도이다. - 내륙 수역은 약 10,700 ㎢를 덮고 있으며 그 중 대부분은
빅토리아(Victoria) 호수와 투르카나 호수(Lake Turkana)에 있다. - 동쪽으로 인도양과 소말리아 공화국, 북쪽으로 에티오피아와 남수단, 서쪽으로 우간다, 남쪽으로 탄자니아 공화국이 있다.
- 케냐의 지리적 좌표는 1.00 N, 38.00 E이다.
- 케냐의 기후는 해안을 따라 열대기후에서, 내륙의 건조 기후까지 다양하다.
- 케냐의 날씨는 일반적으로 일년 내내 맑고 주요 우기는 3월~5월, 11월~12월이다.
Economic setting
- 케냐의 주요 경제 활동에는 농업, 임업, 관광, 어업, 에너지 및 제조업이 포함된다.
- 이러한 부문은 2014년에서 2018년 사이에 약 5%의 연간 국내 총생산(GDP) 성장에 기여했다.
- 2018년 케냐 GDP는 860억 달러로 추정되어 세계에서 69번째로 큰 경제국이 되었다.
- 농업 부문은 케냐의 GDP에 평균 21.9%에 기여했다.
- 2013-2017년 GDP, 2017년에는 전체 노동력의 최소 56%가 농업에 고용되었다.
- 또한 농업 부문은 케냐 총 수출의 65%를 차지하며 차, 절화, 정제 석유, 커피, 콩류가 케냐의 최고 수출품이다.
- 2017년 수출은 케냐 전체 수출의 22.3%를 차지하는 차(茶)가 주도했고 절화(11.2%), 커피(5.5%)가 그 뒤를 이었다.
- 커피 산업은 연간 약 230억 KSh의 외환 수입, 고용 창출, 가족 농장 소득 및 식량 안보를 통해 농업 성장에 기여한다 (International Coffee Organization, 2019).
식민지 이전의 역사
기원전 2000년경, 북아프리카에서 온 쿠시어족이 현재 케냐가 위치한 동아프리카의 일부에 살았다. 아라비아 반도에 가깝기 때문에, 기원 1세기까지는 케냐의 해안에 아랍 상인들이 자주 방문하게 되어, 거기에 아랍인과 페르시아인의 식민지를 만들었다.
기원전 500~기원후 500년 사이에 아프리카 대륙 각지에서 이동한 부족이 케냐에 정착하였다. 케냐 원주민은 고대로부터 해안가 지역에서 이슬람, 인도 상인들과 상아와 노예무역을 했다. 내륙 지방은 반투족, 마사이족 같은 호전적인 부족들이 주로 있었다. 14세기에는 동부 해안 지대에 아랍계 스와힐리 공동체(Swahili Community)가 정착하였다. 나이록계(Nilotic people)와 반투계의 사람들(Bantu people)도 기원후 최초의 천년간에 이 지역에 들어가 내륙에 정착했다.
반투어와 아랍어가 융합되어 발달한 스와힐리어는 다양한 사람들 사이의 교역을 위한 공통어로 발전했다.
유럽인
1400년 초 케냐에 도착한 최초의 외국인은 중국인으로 해안도시 라무(Lamu)에 정착하였다.
1498년에 포르투갈인들(Vasco da Gama)이 몸바사(Mombasa)와 그 다음 말린디(Malindi)에 왔을 때 해안 지역의 아랍인의 지배력이 억압되어 몸바사(Mombasa) 항은 극동으로 향하는 포르투갈 선박을 위한 중요한 보급지가 되었다.
1593년~1698년에는 포르투갈이 케냐의 몸바사(Mombasa) 항을 점령하여 예수의 요새(Fort of Jesus)를 건설하고 몸바사를 비롯한 해안가 지방을 지배했다가 오만 해상 제국의 산하로 들어갔다.
그 후는 19세기에 또 다른 유럽 세력, 이번에는 영국이 왔다.
식민지의 역사
케냐의 식민지 역사는 1885년 독일이 잔지바르(Zanzibar, 현 탄자니아의 잔지바르 섬) 술탄의 케냐 해안 영토에 보호령을 설치한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 후 1888년 영국 동아프리카 회사가 들어왔고, 1890년 영국과 독일은 동아프리카 지역을 분할하는 데 합의하여 영국은 케냐와 우간다 지역을, 독일은 탄자니아 지역을 점령하였다.
1895년 7월 베를린 회의에 의해 영국은 케냐에 대해 보호령을 선포하고, 케냐 공동체로부터 비옥한 고지대 토지를 빼앗아 유럽의 백인 이주자들에게 개방함으로써 정착하게 했다. 결국 1920년 케냐는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식민 시대에 케냐인들은 정치 과정에의 참여를 점차 증대시켜 나갔다. 1906년에는 유럽인으로만 구성된 입법 위원회 (Legislative Council)가 구성되었지만 1920년에는 아프리카인의 각종 정치·사회단체가 결성되었다. 1920년에 공식적으로 영국 식민지로 선언되기 전에도 이주민들은 참정권을 받았지만, 아프리카인과 아시아인들은 1944년까지 직접 정치 참여를 금지했다. 했다. 이 기간 동안 수천 수만의 인도인들을 케냐에 데려와 케냐-우간다 철도선 건설에 종사했고, 그 후 그 땅에 정착하여 인도인들이 많은 친족을 불러들였다.
식민통치에 대한 저항 - 마우 마우 운동
1942년, 키쿠유족, 엠브족, 메루족, 캄바족 사람들이 영국의 지배로부터 자유를 찾아 싸우기 위해 비밀리에 결속했다. 이 맹세와 함께 마우마우 운동이 시작되고, 케냐는 독립국가로의 길고 어려운 길을 걷기 시작한다. 1944년 5월에 이르러 케냐 국민의 정치 참여가 허용됨에 따라 입법 위원회에 최초로 케냐인이 진출하게 되었다. 1946년에는 조모 케냐타 (Jomo Kenyatta)가 케냐 아프리카인 동맹(KAU)의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송태진(2019) 작가의『아프리카 좋으니까』라는 책(일리 출판사)에 보면 마우 마우 운동을 흥미롭게 설명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아프리카인들도 전쟁에 휘말렸다. 영국령 아프리카에서 105만 명, 프랑스령 아프리카에서 19만 명 등 135만 명에 달하는 아프리카계 군인들이 전쟁에 투입되었다. 영국군에 소속된 케냐 군인들은 주로 버마 정글에 파병되어 일본군의 인도 침략을 저지했다. 케냐인들은 그곳에서 믿을 수 없는 장면을 목격했다. 백인들이 붉은 피를 흘리며 비참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케냐에서는 신의 대리인처럼 고상하게 굴던 백인 주인이었지만 전쟁 앞에서는 그저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나약한 인간일 뿐이었다. 1945년, 마침내 전쟁이 끝났다. 참전했던 케냐인들은 영국을 위한 자신들의 희생에 적합한 대우를 받길 기대했다. 그러나 바뀐 것은 없었다. 백인 주인들은 전리품과 명예를 차지했다. 그러나 주인을 위해 피를 흘린 충직한 하인은 여전히 하인일 뿐이었다. 케냐인들은 분노했다. 그들은 더 이상 잔인한 주인을 섬길 이유를 찾지 못했다. 문득, 케냐인들은 백인들이 본래 도둑이었다는 걸 기억해냈다. 그들은 마치 최면에서 풀린 듯했다. 그렇다. 영국인은 이 땅의 주인이 아니었다. 쫓아내야 할 불청객이었다. 진정한 주인은 자신들이었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당연한 진실을 마주한 케냐 사람들은 절규하듯 외쳤다. 이싸카 나 위야씨! (Ithaka na Wiyathi!). 땅과 자유를 뜻하는 이 키쿠유 방언은 독립을 상징하는 구호가 되어 사람들 사이에 퍼져갔다. 빼앗긴 땅과 자유, 이싸카 나 위야씨를 되찾기 위해 사람들은 뭉치기 시작했다.
마우마우(Mau-Mau)단은 케냐 키쿠유族이 1950년대 영국의 식민통치에 대항하기 위해 조직했던 무장투쟁단체로 백인과 백인에 협력하는 흑인들을 대상으로 산발적인 테러 활동을 벌였다. 영국 정착민들에 의해 점차적으로 빼앗긴 땅을 되찾기 위해 노력한 Kikuyu, Embu 및 Meru 부족의 무장 군대인 Land Freedom Army(KLFA)로 시작되었다.
1952년, 괴한들이 백인을 습격했다는 소식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그들은 낮 동안엔 산 속 덤불에 숨어 있다가 밤이 되면 백인 농장을 공격했다. 백인들이 하나 둘 살해되었고 이주민 사회는 뒤숭숭해졌다. 영국인은 조용하게 말을 잘 듣던 키쿠유 사람들이 갑자기 난폭하게 변한 것에 놀라 대책 마련에 착수했다. 습격자들은 ‘마우마우’라고 불렸다. 깊은 밤, 백인 농장의 일꾼들과 인근 마을 주민들이 소리 없이 모였다. 마우마우 단원들이 민중들에게 독립 의식을 교육하고 믿을만한 자가 누구인지 파악하려는 목적으로 소집한 비밀 집회였다. 마우마우 단원들은 백인을 몰아내려면 케냐인 모두가 하나의 목소리로 외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참석한 사람들은 케냐에서 백인을 쫓아내는 데 목숨을 바치겠다는 비밀 결사를 조직했다. 그들의 뜻은 의미 깊었으나 과격한 면이 있었다. 안타깝게도 다른 의견을 가진 자들은 가혹한 대우를 받았다. 맹세를 거부하면 백인을 돕겠다는 뜻으로 해석되었고 폭행당하거나 살해 위협을 받기도 했다. 마우마우의 비밀 결사 의식을 통과한 남자는 백인을 습격할 때 동참해야 했고, 여자들은 음식과 은신처를 제공해야 했다. 맹세를 한 사람은 누가 마우마우 단원인지 발설하지 않고 비밀을 지켰다. 많은 사람들이 비밀 맹세를 했지만 평소에는 그와 관련된 대화를 일절 꺼내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은밀한 지령에 의해 사람들은 움직였고 백인들의 피해는 계속되었다. 영국 식민 정부는 경찰과 군인을 동원해 마우마우에 협력하는 사람들을 색출하려 했지만 농장 일꾼과 마을 사람들은 자기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딱 잡아뗄 뿐이었다. 백인들 앞에서 흑인 사회 전체가 거대한 연극판처럼 움직였다.
영국은 마무마우 단원들에 의한 테러와 투쟁이 잇따르자, 영국은 가장 폭력적인 방법으로 케냐의 독립운동을 진합하고자 했다. 반란의 폭력에 대응하여 영국 식민 정부는 케냐에 약 80,000명의 키쿠유족을 투옥하는 수용소 시스템을 만들었다. 수용소 내에서 수감자들은 공격적인 심문을 받았고 수천 명이 끔찍한 학대를 당했으며 몇몇 수감자들이 목숨을 잃었다. 1952년 10월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통행금지령을 내리고 대대적인 탄압에 나섰다. 경찰은 아무 집에나 불쑥 들어가 집안을 홀랑 뒤집어 놓곤 했다. 5만 5,000명의 영국군이 케냐로 파병되어 마우마우로 의심되는 2만여 명을 재판도 없이 학살했다. 공식 재판에서는 1,090명의 남자가 사형 선고를 받았고, 30명의 여자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1956년까지 키쿠유 저항세력 1만 527명이 사망하고 2만 6,625명이 체포되었다. 영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마우마우 지도자 조모 케냐타 (Jomo Kenyatta, 1894~1978년)도 1952년 10월 체포되었다. 그는 마우마우 조직의 관리자라는 혐의로 기소됐고, 1953년 4월 법원에서 7년간의 중노동형을 선고 받았다.
데단 키마티 와추우리(Dedan Kimathi Wachuuri)는 1956년 마우마우 폭동에서의 역할에 의해 독립운동의 지도자 중 한 명으로 체포되었다. 그 후 1957년에 식민지주의자들에 의해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리고 케냐는 1952년 10월부터 1959년 12월까지 비상사태하에 놓였다. Kimathi는 1950년대 초에 운동 내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으며 처음에는 Mau Mau 운동 내에서 입문 방법이자 충성심을 보장하는 방법인 선서 관리자로 활동했다. 그는 1952년 말 비상사태가 선포된 후 영국군에 맞서 싸우기 위해 숲으로 향하는 전사들의 리더가 되었다.
정부는 Mau Mau의 지도자들을 잡기 위해 필사적으로 Dedan Kimathi를 '제거'하기 위한 끊임없는 캠페인에 착수했으며 그의 체포에 대해 큰 보상을 제공했습니다. 식민 장교들은 '마우마우 최고 등급 지도자들이 살아 있는 한 그들의 존재는 언제나 안보에 큰 위협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1956년 10월 21일 이른 아침에 키마티는 체포되었다. 영국 식민 경찰 이안 헨더슨은 Kimathi를 자신의 은신처에 가두는 데 성공했다. Kimachi는 다리에 총을 맞고 Ndirang Mau라는 부족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키마치는 판가(아프리카 마체테 모양의 칼)로 무장한 모습이었다. 그의 체포는 산림 전쟁 종식의 시작을 알렸다. Mau Mau와 그 지지자들의 사기를 꺾기 위해 들것에 실린 Kimachi의 이미지가 영국인에 의해 전단에 인쇄되었다(120,000부 이상 배포됨).
힘들고 복잡한 재판 끝에 1956년 11월 19일 케네스 오코너 대법원장은 키마티에게 총기와 탄약의 불법 소지 혐의로 유죄 판결을 내렸다. 이는 영국 식민정부가 제정한 비상 규정에 따라 불법으로 규정된 행위이다. 1957년 2월 18 일 , Kimathi는 "죽을 때까지 목을 매다는 형"을 선고받았는데, 이는 그를 케냐의 질서를 유지하려는 영국의 잔혹한 결단의 상징으로 만들고 마우 마우(Mau Mau) 운동의 순교자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처형 당일 아침에 아내 무카미는 키마치를 만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거의 2시간 동안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그는 그녀에게 "나는 영국이 나를 처형하기로 결정했다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 나는 죄를 짓지 않았다. 나의 유일한 죄는 내가 해방군을 이끌었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나는 당신과 나의 가족을 위해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는다. 내 피가 독립의 나무에 물을 줄 것이다." 식민 관리들은 케냐의 카미티 최대 보안 교도소 부지 내에 있는 표시 없는 무덤에 그의 시신을 묻었으며, 키마치 재단이 무덤 위치가 카미티 감옥 부지에서 확인되었다고 보고할 때까지 62년 동안 매장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Dedan Kimathi의 체포와 죽음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기념비의 명판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새겨져 있다 : "It is better to die on our feet than live on our knees for fear of colonial rule."
그 무렵에는 마우마우의 반란이 더욱 폭동화되어 수천 명의 케냐인들이 투옥되었다. 강한 압박에 못 이겨 비밀을 누설하는 변절자들이 생겨났고, 비밀 맹세에 참여한 사실이 발각된 이들은 수용소로 끌려갔다. 고토를 되찾길 바랐던 15만 명의 케냐인들이 폭력과 고문, 성범죄가 횡행한 반인륜적 수용소에 갇혀 고통을 겪었다. 분노한 마우마우 단원들은 비밀을 발설한 배신자들을 찾아 복수했다. 복수를 당한 사람들은 도리어 영국을 지지하며 민병대를 조직해 마우마우와 대적했다. 백인 편에 선 자들과 마우마우 편에 선 자들이 서로 갈라져 학살과 복수를 거듭하는 비극이 펼쳐졌다. 그 과정에서 오해와 누명이 겹치며 무고한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1952년부터 1960년까지 케냐를 뒤흔들었던 마우마우 운동은 영국의 무자비한 진압과 내부 분열로 힘을 잃으며 처절하게 마감되고 말았다. 이 시기, 아프리카인의 정치과정 참여가 급속히 확대되었고, 1954년에는 세 인종(유럽인, 아시아인, 아프리카인) 모두가 케냐 의회에 대표를 보낼 수 있었다.
케냐의 독립
사태가 점점 확산되자 영국은 단계적으로 케냐의 독립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1957년 처음으로 아프리카인들이 피선거권을 가진 입법 회의 직접 선거를 치렀다. 그러면서 좀 더 온건한 세력에게 권력을 넘기려는 영국의 기대와는 달리 조모 케냐타가 이끄는 케냐아프리카민족동맹(KANU, Kenya African National Union)이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 조모 케냐타는 1960년 5월 4일 KANU의 대표로 선출되었으며, 1963년 5월 총선에서 124석 중 83석을 확보하였다. 영국의 혹독한 탄압에도 굴하지 않은 키쿠유 저항군의 무장투쟁으로 케냐는 마침내 1963년 12월 12일 독립을 쟁취했다. 마우마우 투쟁 과정에서 독립운동 지도자로 부각된 조모 케냐타는 케냐공화국의 초대 총리(1963~1964년)와 초대 대통령(1964~1978년)을 역임했다. 이 시기에 1만 3500명의 케냐인이 피살되고 약 10만 명이 구금되었다. 1963년 6월 케냐 자치 정부가 수립되었고, 이어 같은 해 12월 12일 케냐는 독립을 선언하였다.
1당 정치체제
케냐의 독립 이후 1964년 11월 키쿠유(Kikuyu), 루오(Luo), 캄바(Kamba)족 대표인 케냐아프리카민족동맹(KANU)과 소수 종족 대표인 케냐아프리카민주당연합(KADU)이 합당하여 케냐아프리카민족동맹(KANU)의 일당 체제를 구축하였다. 1964년 12월 12일에는 케냐공화국을 선포하였으며, 케냐의 국부로 불리는 조모 케냐타(Mzee Jomo Kenyatta)가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고 영국 연방에 가입하였다.
1966년, 소규모이지만, 유력한 좌익 야당인 케냐 인민 동맹(KPU, the Kenya People’s Union)이, 전 부대통령이면서 루오의 장로였던, 자라모기 오깅가 오딩가(Jaramogi Oginga Odinga)에 의해 조직되었다. 그런데 KPU는 그 후 곧바로 금지되어 버린다. 1969년에는 리더가 체포되어 케냐는 '사실상' 단일 정당 국가가 되었다.
독립 직후 조모 케냐타(Jomo Kenyatta) 정부는 민간 산업 투자(해외 투자 포함)에 대한 인센티브를 포함하는 수출 지향적 성장 전략을 추구했다. 커피, 차, 관광 산업이 호황을 누리고 정부는 인프라와 교육에 막대한 투자를 했다. 케냐타는 또한 아프리카인들에게 식민시대의 백인 정착민들의 토지를 대규모로 재분배하는 것을 지원했다. 처음에는 주로 키쿠유족 엘리트 집단에게, 다음에는 수십만 명의 소규모 자작농들에게 정부에 대한 지속적인 지원을 보장했다. 독립 후 첫 10년 동안 케냐의 실질 국내총생산(GDP)은 1970년 단 1년간의 경제 하락을 제외하고 복리 기준으로 7.9% 성장했다 (WDI).
모이 시대
1978년 8월 케냐타 대통령이 사망하면서 소수 종족인 칼렌진 출신의 대니얼 토로이티치 아랍 모이 (Daniel Toroitich arap Moi) 부통령이 대통령 및 케냐아프리카민족동맹(KANU) 당수로 취임하였고, 1979년 대통령선거에서 단독 입후보로 나서 대통령에 당선되어 12월에 제2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1978년 케냐타가 사망한 후, 다니엘 아랍 모이(Daniel arap Moi) 부통령이 케냐타의 뒤를 이은 것이었다. 케냐타 대통령 임기가 끝날 무렵, 부는 케냐타 가족과 키쿠유족의 손에 점점 더 집중되었다. Moi는 토지 할당 정책을 검토하고 부패를 척결하며 산업의 외국인 소유를 제한하고 초등학교 수업료를 폐지하겠다고 공약했다. 그러나 경제가 약화되었고 Moi는 초기 약속을 이행할 수 없었다.
경제가 흔들리자, 1982년 6월 케냐아프리카민족동맹을 유일한 합법 정당으로 하는 헌법 개정안이 통과됨으로써 케냐는 공식적으로 일당 체제 국가가 되었고 그때까지 정치적 반대가 커졌다. 같은 해, 모이는 공군의 쿠데타 시도를 막아냈고 이후 쿠데타를 해체했다. 이후 모이 대통령은 1983년 무투표로 재선에 성공했고, 1988년에도 무투표로 3선에 성공하였다. 1980년대 내내 모이는 권력을 통합하고 공무원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으며 부패는 계속해서 만연했다. 고문을 포함한 인권 침해에 대한 보고가 흔했다. 이에 대응하여 국제 기부자들은 1991년에 케냐에 대한 원조를 중단했는데, 이는 간헐적으로 중단된 수많은 중단 중 첫 번째 사례였다. 모이는 다당 체제를 복원하는 데 동의했지만 1992년과 1997년 선거에서는 광범위한 부정선거 소문이 퍼지는 가운데 그를 권좌에서 쫓아내지 못했다. 1993년까지 케냐는 높은 인플레이션과 GDP의 10%가 넘는 공공 적자를 겪었다. 이러한 문제와 World Bank의 압력으로 인해 케냐 정부는 비록 산발적이긴 하지만 경제 자유화를 시작해야 했다. 1994년 케냐 정부는 수입과 외환에 대한 통제를 철폐했다. 또한 다양한 국영 기업을 민영화하고 공무원 수를 줄였으며 보다 보수적인 재정 및 통화 정책을 도입했다. 1995년에는 외국인의 나이로비 증권거래소 투자가 허용되었다.
1991년 8월 라일라 오딩가(Raila Odinga), 마틴 시쿠쿠(Martin Shikuku) 등이 민주회복협의회(FORD)을 결성하였고 12월에는 다당제 헌법 개헌안이 확정되었다. 1992년 10월 모이 대통령이 의회를 해산하였고 12월에는 다당제 아래 최초의 총선이 실시되어 모이 대통령이 4선에 성공하고 케냐아프리카민족동맹이 의회 다수당으로 재집권하였지만 야당도 의회석의 45%를 차지했다. 더 자유화 된 1997년 총선에서도 모이가 야당의 분열에 힘입어 재선되었고 KANU도 간신히 과반수의 표를 획득했다.
1997년 케냐는 IMF에 대한 거버넌스 개혁 약속을 이행하지 못했다. 이후 IMF는 3년 동안 대출을 중단하고 9천만 달러의 구조 조정 신용을 보류했다. 케냐는 1999년 반부패청(ACA)을 설립하고 투명성을 개선하기 위한 기타 조치를 취함으로써 이에 대응했다. 2000년에 IMF는 빈곤감소 및 성장기금 1억 5천만 달러를 약속했고, 세계은행은 경제 및 공공 부문 개혁에 1억 5,700만 달러를 지원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2000년 12월 ACA가 위헌으로 선언된 후 IMF와 세계은행은 다시 ACA 프로그램을 중단했다.
음와이 키바키 대통령
하지만 헌법상 모이가 재선을 노릴 수 없게 된 2002년 12월 대통령선거 및 총선거에서는 야당이 연합하여 국민무지개연합 (NARC, National Rainbow Coalition)을 결성, 음와이 키바키(Mwai Kibaki)를 대표로 내세워 제3대 대통령에 당선시킴으로써 독립 후 계속되었던 KANU의 독주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 후 개헌 문제가 케냐 정치의 최대 현안이 되었는데 이 문제로 국민무지개연합은 분열되었고 2005년에는 음와이 키바키가 지지한 개헌안이 대통령의 권한을 충분히 억제하지 않는다는 논란 속에 국민투표 끝에 부결되었다.
2002년 다당제 선거가 열렸으며 야당 연합의 지도자인 음와이 키바키(Mwai Kibaki)가 모이가 선택한 후보인 조모 케냐타(Jomo Kenyatta)의 아들인 우후루 케냐타(Uhuru Kenyatta)를 누르고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Kibaki는 보편적인 무상 초등 교육 도입, 부패방지조치 실행, 사법부 청산노력 시작 등 여러 진보적인 정책을 주도했다. 국제 기부자들은 원조를 재개함으로써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의 이행은 미약했으며, Moi 또는 그의 동료에 대한 법적 조치가 없었기 때문에 부패방지 노력은 신뢰할 수 없었다.
대연립정부 (The Grand Coalition)
2007년 12월 27일 제10회 총선거(대통령, 국회, 지방 의회)에서는 키바키 (Mwai Kibaki) 대통령이 재선하였으나 부정선거 시비로 7주간의 전국적인 소요 사태가 발생하여 1,500여 명이 사망하고 35만여 명의 이재민이 발생하여 사회생활과 경제활동이 사실상 마비되었다.
2008년 2월 28일 코피 아난(Kofi Annan) 당시 UN 사무총장이, 아프리카연합의장 탄자니아 대통령 Jakaya Kikwete, 그리고 Graca Machel 여사(모잠비크 초대 대통령 미망인, 넬슨 만델라 미망인), Benjamin Mkapa (칸자니아 3대 대통령, 1938~2020), Joachim Chisano(모잠비크 2대 대통령) 등의 지원을 받아, 중재에 나선 결과 여당(Mwai Kibaki 대통령)과 야당(Hon. Raila Odinga)은 권력을 분할하는 대연립정부(Grand Coalition) 구성에 원칙적으로 합의하였다. 그리하여 2008년 4월 국민연합당(PNU)-오렌지민주화운동(ODM) 사이에 대연립정부 내각이 출범하여 라일라 오딩가 (Raila Odinga)가 총리에 취임하였다.
제2공화국 출범
2010년 8월 새 헌법을 위한 국민투표가 실시되어 통과됨으로써 새 헌법 공포 및 제2공화국이 출범하였다. 새 헌법은 1963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최초로 케냐 국민들이 스스로 제정한 것으로, 대통령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완화하고, 견제와 균형의 원칙을 지키며, 사법부를 개혁하고, 인권을 강화할 것 등을 규정하고 있다. 2011년 9월에는 대통령선거 폭력 사태 주모자(6명)에 대한 국제형사재판소ICC의 조사 절차가 개시되었다. Mwai Kibaki 대통령은 Raila Odinga Hon과 함께 2013년 3월까지 두 번째 임기를 역임했다.
2010년 새 헌법의 골자 중 하나는 대통령과 중앙정부에 집중된 권력을 분산시키는 제도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대통령의 권력독점을 견제하기 위해 행정부에 수상(Prime Minister) 및 부수상(Deputy Prome Minister) 직이 신설되었고, 지방분권은 카운티(county)제도를 중심으로 개편되었다. 케냐의 행정구역은 이전의 provinces를 구성하던 district를 기반으로 47개의 카운티로 재편되었다. 지방분권은 독립을 전후한 시키부터 일부 케냐인들, 특히 소수집단에게는 숙원이었다. 독립을 앞두고 케냐 정치권은 내륙 출신 다수 민족집단, 특히 Gikuyu와 Lou 민족집단이 주도적 역할을 했던 Kenya African National Union과, Kalenjin, Maasai, Mijikenda 등의 소수민족집단 출신 정치인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Kenya African Democratic Union으로 양분되어 있었다. 전자의 케냐아프리카민족동맹은 중앙집권제를 선호하는 반면, 후자의 케냐아프리카민주주의동맹은 소수 민족집단의 자치권을 인정하는 연방주의를 강렬으로 채택했다. 독립 이후 중앙집권제가 시행된 케냐에서는 중앙정부에 권력이 집중되면서, 정부 요직을 차지한 다수 집단 출실 엘리트들이 국가의 자원을 독식하는 폐해가 발생했다. 지방 거주 소수집단들은 이런 상황에 환멸을 느끼고 지속적으로 지방분권을 주장했다. 1990년대 초반 다당제 선거 실시 후, 소수집단의 표를 의식한 몇몇 정치인들이 지방분권제를 선거공약으로 내세우기도 했지만, 정권을 잡은 후에는 중앙정부로의 권력집중은 더욱 심화되기만 했다. 2010년 신 헌법에서는 지방자치권을 어느 정도 인정받을 수 있데 된 것이다.
2013년 3월에 치러진 케냐 대통령선거에서는 우후루 무이가이 케냐타(Uhuru Muigai Kenyatta)가 제4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4월 9일에 취임했다. 우후루 케냐타는 초대 대통령인 조모 케냐타(Jomo Kenyatta)의 아들이다. 케냐타 대통령은 안정적으로 국정 운영을 했다고 자평하고 있으며, 2013년 9월 21일 나이로비 내 웨스트게이트 쇼핑몰에서 발생한 알샤바브 테러 사건을 효과적으로 진압하고 인질들을 구출해 국내외에서 입지가 강화되었으며, 전 국민의 연대를 강조함으로써 종족 및 정치적 분열을 다소 완화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케냐타 대통령은 지난 2007년 대선 후 개표 부정 시비를 계기로 폭력 사태를 조장했다는 혐의로 국제형사재판소(ICC)에 의해 기소된 바 있으나 2014년 12월 ICC가 추가증거 확보 난항을 이유로 케냐타에 대한 공소를 철회하였다. 또한 2016년 4월에는 같은 혐의로 기소된 윌리엄 루토(William Ruto) 당시 부통령의 공소를 ICC가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기각하였다. 2017년 10월 26일 케냐타 대통령과 윌리엄 사모에이 루토(William Samoei Ruto) 부통령아 재선되어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하였다.
2022 케냐 대통령 선거 및 총선
2022년 8월 9일 케냐에서 총선이 치러졌다. 케냐의 대통령, 부통령, 주지사, 상원의원, 국회의원, 여성 의원, 카운티 의회 의원을 선출했다. 5년 마다 열리는 총선에서, 2022년 총선은 2010년 헌법이 공포된 이후 세 번째 총선이자 네 번째 대통령 선거였다. 5대 대통령이었던 우후루 케냐타는 케냐 헌법에 따라 3선에 출마할 자격이 없었고, 군수도 연임할 자격이 없었다. 2022년 총선은 1992년 다당제 시행 이후 가장 낮은 대선후보 경선이 치러졌다. 당시 부통령(Deputy President, 2013-2022))이었던 윌리엄 사모에이 루토(William Samoei Ruto)가 50.49%를 득표하여 48.85%를 득표한 전직 총리(2008~2022) 출신인 Orange Democratic Movement의 리더 라일라 오딩가를 제치고 케냐의 6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날 치러진 총선에서는 오딩가 후보의 정당인 오렌지민주운동을 필두로 하는 정당연합인 아지미오(Azimio, Azimio La Umoja 통합의 약속)가 전체 333석 중 168석을 얻어 다수당의 지위를 차지했으며, 루토 부통령의 정단연합 케냐 콴자(Kenya Kwanza)는 167석을 확보했다. 상원에서는 케냐 콴자가 33석을, 아지미오가 32석을 차지했다.
- Interbational Coffee Organization (2019). ICC 124-7 Country Coffee Profile: Kenya (International Coffee Council 124th Session 25-29 March 2019, Narobi, Jenya).
- Hussain, Lamya Adil Sulliman/Inzoli, Federica et. al. (2020).
FEEM Approach to Supply Chain Analysis The coffee Sector in Kenya. [S.l.] : SSRN. - 송태진 (2019). 아프리카 좋으니까. 일리 출판사.
- 주일 케냐대사관 홈페이지 http://www.kenyarep-j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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